항목 ID | GC04301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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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紺嶽山 山祭祀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황방리 |
집필자 | 서영각 |
의례 장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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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
성격 | 민간 신앙|마을 제사 |
[정의]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황방리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감악산 산제사는 신암리에서는 매년 음력 9월초, 황방리에서는 매년 10월 초에 감악산 정상에서 감악산 산신에게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던 제사이다. 감악산은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황방리, 파주시 적성면, 연천군 전곡읍에 걸쳐 있는데, 이 일대 주민들이 감악산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던 산신제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근래까지 계속해서 행해졌다. 남면 황방리와 신암리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로 한 해 두 차례씩 산신제를 지내며 치성을 드렸으나 지금은 예전과 같은 산신제는 볼 수 없다.
[연원 및 변천]
『적성현지(積城縣誌)』[1871]에는 매년 세 차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향과 축(祝), 폐(幣)를 영문(營門)에서 받아 와서 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요즘도 감악산 근처 주민들은 감악산 꼭대기에 있는 빗돌대왕비의 영험함을 믿고 있으며, 감악산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에 대해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예전에 감악산 산신제를 지내러 갈 때는 새벽 시간 날이 밝기 전에 올라가야 하며, 만약 부정한 것을 보고 노구메 밥을 지으려 하면 우물의 물이 흐려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감악산 산자락에는 굿당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도 많이 찾고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충청남도 계룡산 산신에 버금가는 음기(淫氣)를 가진 산신이 감악산 산신이라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감악산 정상에는 감악사(紺嶽祠)라는 사당이 있었으며, 신라 시대 이후 이곳에서 감악산 산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렸다. 1409년(태종 9) 기록에 감악산 신당(神堂)이란 단어가 보인다. 여기서의 사당은 감악사를 지칭하는 말로 짐작된다. 조선 초기 이 신당에는 위판(位版)은 없고 단지 이상(泥像)[진흙으로 만든 상]이 6개 있었으나 나중에 감악산지신(紺嶽山之神)이라는 위판을 따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500년(연산군 6) 2월 1일 조에는 신당의 제청(祭廳)을 수리하는데 자그마치 140일이 걸렸다고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공사를 강행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국가적인 차원에서 감악산 산신제를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감악사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처음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도 감악사 제사는 계속되었으며 김정호(金正浩)[?~1866]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고려 시대 이후 3척 높이의 석단(石壇)이 제당에 마련되어 있고, 오래 된 비석과 함께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모신 사당으로 설인귀사(薛仁貴祠)가 있다고 하였다.
[절차]
감악산 산신에게 지내는 산신제는 양주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지내던 산신제와 그 절차나 순서 및 형식이 대략 같다. 제물을 차리고 여느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축문]
감악산 주변 마을 사람들은 신성한 감악산에는 특별한 산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감악산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산신제를 빠트리지 않고 지냈다. 감악산 산신제는 감악산 정상에서 지냈지만, 이 외에도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똑같이 감악산 산신을 모셨다. 감악산 산신제에 사용한 축문은 조사된 자료가 없다.
[현황]
지금도 무속인들은 감악산 산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또한 등산인 모임 가운데 이곳에서 시산제를 지내는 산악회가 많을 정도로 감악산을 영험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