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1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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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民國漁業前進基地苧洞港 |
영어의미역 | Jeodong Port as the Base of Korean Fishery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1·2리, 도동3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국진 |
[개설]
수많은 어선들이 드나드는 다목적 어항(漁港)인 저동항은 망망대해 동해에 떠 있는 섬 울릉도의 울릉읍 저동1리·저동2리와 도동3리에 위치해 있다. 1967년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면서 개발되고,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항 공사 기간 중 태풍과 해일 등으로 공사에 애로를 겪었다고 하는데, 물양장 980m·돌제 85m·선양장 7m 등 기본 시설은 1980년에 완공했으며, 남방파제 580m는 2002년에, 북방파제 275m는 2003년에 공사가 끝났다.
저동항은 태풍 등 기상특보 때는 동해 먼바다에서 조업 중인 선박의 안전을 지켜 주는 피난처이기도 하다. 또한 울릉군에서 생산되는 오징어의 대부분이 저동항을 거쳐 육지로 나갈 만큼 울릉도 오징어와의 인연도 각별한 곳이다.
[일출이 아름다운 저동항]
독도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 바로 울릉도이다. 울릉도 북동쪽의 섬목이나 현포항도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손꼽히지만,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한 저동항의 일출에는 비길 바가 아니다. 촛대처럼 생긴 바위 위로 해가 떠오를 때면 마치 촛대봉 위에 온 세상을 밝히는 촛불을 켠 듯 장관의 풍경을 연출한다.
저동항의 우측으로는 울릉도 해안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울릉군은 울릉도의 관문인 도동항과 울릉읍 저동항을 연결하는 628m의 해안에 행남해안산책로를 개설하였다. 이곳은 도동 여객선터미널 좌안 산책로로 이어지는 해안 코스로, 행남등대에서 저동항과 푸른 바다, 죽도를 구경할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산책로 입구부터 봄에는 산나물로, 여름에는 녹음 우거진 숲으로, 가을에는 보랏빛 해국과 노란 털머위꽃으로, 겨울에는 눈내리는 겨울바다로 관람객을 사로잡는 곳이기도 하다.
[박정희와 저동항의 인연]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및 대통령권한대행으로 박정희가 울릉도에 도착한 것은 1962년도의 일이다. 박정희는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방문하였는데, 군함은 저동항으로 들어갈 수 없어 저동항 앞에서 멈추었고, 박정희는 보트로 갈아타고 저동항으로 올라서야만 했다.
당시의 저동항은 말이 항구이지 방파제나 제대로 된 접안 시설 하나 갖추어지지 못한 초라한 어촌에 불과하였다. 국가원수격인 박정희는 결국 보트에서 내리면서 물에 빠진다. 당시 상황에 대해 수협사무실에 모인 울릉읍 주민들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때는 축깡[축항, 방파제]이 덜 돼갖고, 배가 올 수 없는기라. 그래, 군함에서 뽀뜨로 이동해 가, 뽀뜨에서 내리다가 옷을 베리뿐기라.”
박정희가 물에 빠지자, 수행했던 사람들도 당황했지만 가장 당황했던 사람은 박정희 본인이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곧장 ‘울릉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게 되고, 온전한 방파제 하나 없던 저동에는 불과 2년 만에 방파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저동항이 동해안 어업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울릉도 주변 해역의 풍부한 수산 자원 때문이기도 하지만, 울릉도에서 제일 먼저 방파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방파제의 규모도 현재까지 저동항이 가장 크다.
[바위산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다]
방파제 시설이 들어서기까지 저동항은 자연 포구로서 지역 주민들이 해마다 촛대바위 부근에 석축을 쌓아 포구로 이용했다. 하지만 태풍이 한 번 불면 여지없이 휩쓸려 나가곤 했다. “옛날에는 망태기에 줄 매가지고 미고 했는데, 20년 했는데, 저기 보이는 촛대바위라고 있지요. 저기 3분지 1도 못 했어. 지금 높이가 10m 되는데 그전에는 큰 파도 한 번 치면 무너지고, 또 쌓아 놓으면 넘어지고 해마다 해도 끝없이 넘어지곤 했는데.”[울릉읍 김성우]
방파제 사업은 1967년에 저동항이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된 뒤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방파제 축조를 위해 내수전에 있던 석산 하나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 방파제의 높이는 지속적인 보강으로 10m에 이르지만, 당시만 해도 6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오징어축제로 거듭난 저동항과 울릉도]
밤바다를 밝히는 오징어잡이배의 집어등 불빛이 상징하듯 울릉도는 오징어와 더불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동항을 중심으로 울릉도 전역에서 열리는 울릉도 오징어축제는 울릉도의 비경을 배경으로 푸른 동해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아보고, 오징어 건조과정을 체험하면서 각종 오징어 요리를 즐길 수 있는 행사이다. 2001년 8월에 처음 개최되었는데, 관광객과 주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광 축제로, 울릉도 오징어축제추진위원회에서 오징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매년 7월 말경 펼쳐져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오징어와 관련한 것은 다 체험할 수 있다는 울릉도 오징어 축제의 주요 행사로는 오징어무료음식시식, 열린바다낚시대회, 오징어 활복시연, 오징어요리경연, 오징어조업체험승선, 오징어조업현장견학, 오징어맨손잡기, 전통뗏목경주, 호박엿늘리기, 오징어마라톤대회 등을 들 수 있다.
[저동항을 중심으로 한 울릉 지역 어업 현황]
현재 울릉군에서 행해지는 어업 활동의 중심은 오징어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징어잡이는 보통 7월 말경부터 시작해서 10월까지가 성수기이다. 이 때문에 오징어잡이 비수기에는 전복과 소라와 같은 패류와 각종 어류, 해삼, 문어 및 해조류 등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어구 또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어류를 유인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집어등, 낚싯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꿰어 놓은 주낙바구니,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수경, 미역을 걷어 올리는 미역낫 등이 점점 현대식으로 교체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 1965년부터 1970년대까지 울릉군의 수산인구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한일어업협정의 체결을 계기로 어업 근대화와 어촌개발시책이 시행되면서 점차 이곳의 어선 세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어선 세력의 증가는 어업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연안어업이 축소되고 원양어업과 양식어업이 증가하게 된 것은 울릉군 어업별 생산구조 변화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