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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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坪里- |
이칭/별칭 | 괸고개 거북 바위,돌고개 자라 바위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유적/민간 신앙 유적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금희 |
현 소재지 | 금평리 돌고개 자라 바위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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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금평리 돌고개 자라 바위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평리 |
성격 | 기장용 |
크기(높이,둘레) | [덮개돌]가로 약 1.5m, 세로 약 2m, 높이 약 2m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평리 석현 마을 돌고개에 있는 자라[거북] 모양의 바위.
[개설]
순창군 쌍치면 금평뜰을 지나 구림밤재로 통하는 마을 뒷길 고개에 커다란 돌이 하나 있어 그 고개를 ‘돌고개’라 불러 왔고, 마을 이름도 역시 돌고개였다. 1971년 마을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석현(碩峴)이라 고쳤다. 이처럼 마을의 지명 유래가 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바위와 관련하여 기자, 기우제, 동제, 노제 등 여러 가지 풍습이 전한다.
[위치]
금평리 석현 마을 뒤쪽으로 난 돌고개 길을 따라 200m가량 가면 모정이 하나 있는데, 금평리 돌고개 자라 바위는 도로변 풀숲에 자리 잡고 있다.
[형태]
자라 등 껍데기 모양의 커다란 둥근 바위 아래 4개의 작은 돌이 발처럼 받치고 있어 자라 바위 혹은 거북 바위라고 불린다. 가로 약 1.5m, 세로 약 2m, 높이 약 2m의 덮개돌과 키가 낮은 받침돌들로 구성되어 있어 남방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원래는 머리 부분이 존재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머리가 잘려 지금은 덮개 부분에 삼각형으로 움푹 팬 자국만 보인다.
[의례]
이 지역은 예부터 농사에 전력하는 마을이어서, 금평리 돌고개 자라 바위 앞에서 석현 마을·산수 마을·금정 마을·신도 마을·보평 마을이 합동으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예전에는 왼새끼를 꼬아 자라 바위 주변에 두르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정월 대보름과 추석 보름달이 뜰 때 이곳에서 달을 보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는다고도 하며, 처녀총각이 이곳에서 연애를 하면 결과가 좋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생활 민속 관련 사항]
구전에 따르면, 수십 년 전 금평리는 70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어느 날 불이 나서 한 집도 빠짐없이 전소되어 버렸다. 이상한 것은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집들까지 모두 타 버렸는데, 이 때문에 마을 어른들은 이것을 신불(神불) 때문이라고 하였다. 금평리의 동쪽에는 세자봉, 서쪽에는 장군봉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과 바위가 마을에 직접적으로 비추면 마을에 큰불이 난다고 전해 예부터 언덕 위 바위 옆에 화재막이로 나무를 심어 바위를 가렸다고 한다.
원래는 바위 옆에 커다란 귀목이 있었고 그 밑으로 하천이 통과하는 형상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부 사람이 거목을 팔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나무를 베었다. 그러나 그 나무는 겉보기에 하나로 보였으나 세 그루가 합쳐진 것으로 실상 목재로는 별 가치가 없었다고 한다. 기이한 일은 목재를 베어 판 사람과 이를 산 사람 모두 똑같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점이다. 그 후 당산나무는 목재로서는 가치가 없는 잡목을 심었는데, 거목이 되어도 베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금평리 돌고개 자라 바위가 고인돌일 가능성을 언급한 역사학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지역이 6·25 전쟁의 격전지여서 바위에 당시의 상흔이 남아 있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이 지역 사람들은 큰길 언덕 위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이 커다란 바위를 신성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친숙한 대상으로도 생각한다. 자식[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바위로부터 유년 시절 놀이터로서, 평소 들일을 보면서 매일 수차례 그 앞을 지나다니다 죽어서 장지로 떠나는 길에 잠시 상여를 내려놓고 거리제를 지내며 마지막으로 넘는 장소인 것까지, 마을 사람들의 나고 자라 죽음에 이르는 삶의 모든 과정을 이 돌고개 자라 바위가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