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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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川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덕천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형성 |
건립 시기/일시 | 1584년 - 예천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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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예천사 훼철 |
원소재지 | 예천사 원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덕천리 |
성격 | 사우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덕천리에 있던 조선 전기 문신 조흡을 모신 사우.
[개설]
퇴사헌(退思軒) 조흡(曺恰)[?~1429]은 본관이 창녕(昌寧)이고, 초명은 조흡(曺洽)이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에게 나아가 이방원(李芳遠)[태종]과 함께 수학하였다. 1400년(정종 2) 박포의 난에 공훈을 세웠다. 벼슬은 안산 군수 상호군 가선대부 우군 도총제 부동지총제 전라도 시위사 절도사(安山郡守上護軍嘉善大夫右軍都摠制府同知摠制全羅道侍衛司節度使), 가정대부 중군 도총제 부총제 겸 판군기감사 전라도 절제사 겸 나주 목사(嘉靖大夫中軍都摠制府摠制兼判軍器監事全羅道節制使兼羅州牧使), 풍해도 병마도 절제사(豊海道兵馬道節制使), 영길도 도순문사 우군 도총제 평안도 도절제사 사은 표전사(永吉道都巡問使右軍都摠制平安道都節制使謝恩表箋使), 경상 우도 병마도 절제사(慶尙右道兵馬都節制使), 정헌대부 우군 도총제(正憲大夫右軍都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순창으로 내려와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사후에 공희(恭僖)라는 시호를 내리고 병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위치]
순창군 팔덕면 사거리에서 왼쪽 창덕리·산동리 방향으로 500m 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창덕리·산동리 방향으로 3㎞ 정도 간 뒤 삼거리에서 덕진 방향으로 500m 가면 태촌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길을 따라 위쪽으로 100m 가면 조흡의 행적을 기린 신도비(神道碑)가 보이고, 비석이 있는 곳에서 산 쪽으로 조금 가면 예천사(禮川祠)가 있던 곳이다.
[변천]
예천사는 1584년(선조 17) 조흡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순창의 유림과 후손이 순창군 금과면 고례촌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후손과 유림의 공의로 순창군 팔덕면 덕천리 태촌 마을에 다시 세웠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어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재실인 영사재(永思齋)가 예천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형태]
예천사는 현존하지 않아 형태를 알 수 없다.
[현황]
2014년 현재 예천사는 없으나 태촌 마을 길을 따라 위쪽으로 가면 마을 어귀에 조흡의 행적을 기록한 ‘정헌대부 병조 판서 옥천군 공희공 조 선생 신도비(正憲大夫兵曹判書玉川君恭僖公曺先生神道碑)’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