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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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공식명칭 | Protestantism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조규통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 사근교회[현 수동교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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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 안의교회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 함양교회 설립 |
사근교회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수동내동길4-17[화산리 1036-2] | |
안의교회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종로길 11-11[금천리 57-9] | |
함양교회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3길9-4[용평리 795-1]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분파.
[개설]
역사적으로 개신교는 16세기 천주교의 교리적 일탈과 교회의 순수성, 교권의 남용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가들과 그들의 신학사상을 따랐던 부류를 구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31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제국의 유일한 종교 곧 국교(國敎)가 되므로(380년) 교회는 황제와 귀족들의 권력과 비호를 받고 국가는 교회의 종교적 지지를 필요로 하는 상호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교회는 세속권력과 지속적으로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면서 교회 내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변질이 찾아오게 되었다. 첫째는 교리에 있어서의 이탈이었다. 기독교 고유의 사명이었던 복음 전파와 사랑의 실천이 퇴색되고 특히 구원 교리에 있어서 다른 방법들 곧 성자 숭배, 성유물 숭배, 성상 숭배, 고행, 선행 등을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이 확산되었다. 특히 십자군 전쟁을 전후하여 면죄부를 통해 종교세를 확충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둘째,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었다. 국교로서 교회는 물욕과 세속권력에 대한 성향들이 나타나면서 실제 백성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종교로 변모되어갔다. 셋째, 교회 내 권력화 현상에서 나타난 교권의 횡포 현상이 있었다.
이 같은 교회의 세속화와 권력화, 교리와 신앙의 변질에 대해 근본적인 교리였던 이신득의(以信得義)[믿음으로만 의를 얻음]를 주창해서 마르틴 루터가 내건 벽보 ‘95개 조항’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종교개혁운동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기에 전 유럽에서 천주교의 교리적 일탈과 교권의 타락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신학자들과 사제들이 함께 루터의 견해에 동의를 하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것이 개신교의 시작이 되었다.
교리개혁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이후 200여 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교리, 성례전, 교회 행정과 정치에 대한 견해들이 다양화되었고 이에 따라 루터교·장로교·재세례파·성결교·감리교 등으로 분파되었다.
[전래]
1.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
함양군에서 최초로 개신교를 접한 사람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배위량(裵緯良, Rev. William Martyne Baird)[1862-1931]의 1893년 7월 10일자 일기에 “함양에서 온 김(Kim)”씨 성을 가진 사람이 소개되었다. 당시 베어드는 부산에서 영국성서공회 부산 책임을 겸하고 있었는데, 베어드가 가는 곳마다 성경과 기독교 관련 서적을 판매하였다. 그 기간에 만나게 된 인물이 함양군 출신의 김씨였던 것이다. 함양군 출신의 김씨는 진주에서 배포된 전도문서를 접하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지 관심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간접적인 접촉이기는 하지만, 베어드의 일기에 기록된 함양군 출신의 ‘김씨’가 함양군 최초로 개신교와 조우한 인물로 판단된다. 1893년 9월 25일부터 10월 11일간 베어드는 4명의 한국인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선택하여 전도여행을 하게 되는데, 9월 30일 저녁에 사근[현, 수동면 화산리]에 도착하였고 하루를 머물고 난 뒤 함양읍을 지나 서울로 향한다. 베어드의 일기에는 사근에서 일주일을 보낸 것과 입성을 거부당하였던 것, 큰 금액의 식대를 요구받았던 것 등이 기록되었다. 일기에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약간의 책을 판매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함양지역이 개신교와의 첫 직접적인 접촉이 된다.
함양지역의 개신교 접촉은 문서접촉과 베어드 선교사의 순회전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이곳을 방문한 선교사는 심익순(沈翊舜, W. E. Smith)[1874-1932]이었다. 1905년 9월 심익순은 안의, 합천, 거창 등 3개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책을 쉽게 팔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심익순은 한국인 조사(助師) 김주관과 함께 함양군 일대 복음을 본격적으로 전한 인물이다. 사근교회[현 수동교회, 1907 혹은 1909], 안의교회[1907], 함양교회[1909] 등이 이때 세워졌다.
2. 호주 장로교의 선교
1913년에 이르러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역의 선교는 선교지역 분할 조정에 의해 미국 북장로교가 철수하고 호주 장로교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함양군을 포함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호주 선교사들로는 거열휴(巨烈休, Huhg Currel)[1871-1943], 맹호은(孟皓恩, John MacRae)[1884-1973], 길아각(吉雅各, James T. Kelley)[1877-1959], 권임함(權任咸, Frank W. Cunningham)[1887~1981] 등이 있었다.
이들을 도와 매서인 및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던 한국인으로는 김주관(金周寬), 오형선(吳亨善), 황보기(皇甫琪), 주남고(朱南皐) 등이 있었다.
[현황]
선교 초기 호주 장로교단의 1909년의 한 보고에 의하면, 당시 함양지역에는 안의와 함양에 각각 2개씩의 개신교회가 설립되었고 전체 160명 정도의 교인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교회의 수가 현저하게 적었던 것은 함양군을 포함한 산청, 거창 지역이 경상남도의 오지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활동이 힘들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 같은 이유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함양군은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이었으며 ‘지리산선교동지회’와 같은 단체가 생겨날 만큼 접근이 어려웠다.
2018년 기준 함양군 내에는 60여 교회가 산재해 있다. 행정구역별로는 함양읍 12개, 수동면 8개, 서하면 7개, 안의면 7개, 유림면 5개, 지곡면 4개, 마천면 4개, 서상면 4개, 병곡면 3개, 백전면 2개, 휴천면 2개가 분포되어 있다. 교단별로는 고신 21, 통합 20, 성결 4, 기감 4, 합동 4, 대신 2, 독립교회 2, 이 외에 기하성, 구세군, 합동은총 등이 각각 1개 교회씩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