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06 |
---|---|
한자 | 朴淳 |
영어공식명칭 | Park Soon |
이칭/별칭 | 화숙(和叔),사암(思菴),청하자(靑霞子),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출생 시기/일시 | 1523년 - 박순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40년 - 박순 진사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박순 문과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박순 성균관전적, 공조좌랑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54년 - 박순 사간원정언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6년 - 박순 홍문관부교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박순 병조정랑, 이조좌랑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0년 - 박순 의정부검상, 사복시부정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박순 홍문관응교, 한산 군수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3년 - 박순 성균관사성, 시강원보덕, 사헌부집의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4년 - 박순 직제학,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좌부승지, 승정원우승지, 이조참의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5년 - 박순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 사헌부대사헌, 한성부우윤, 첨지중추부사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박순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박순 예조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1년 - 박순 우찬성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2년 - 박순 좌찬성, 의정부 우의정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박순 좌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79년 - 박순 영의정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89년 - 박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43년 - 박순 문충(文忠) 시호 추증 |
묘소|단소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28 |
사당|배향지 | 월봉서원(月峯書院) -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길 133[광산동 452] |
사당|배향지 | 월정서원(月井書院) -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2길 188[금안리 406|409-3] |
사당|배향지 | 옥병서원(玉屛書院)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옥수로327번길 189[주원리 688]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충주(忠州) |
대표 관직 | 좌의정|우의정|영의정 |
[정의]
조선 전기 광주·전라남도 지역 출신으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박순(朴淳)[1523~1589]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청하자(靑霞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소(朴蘇), 할아버지는 박지흥(朴智興), 아버지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낸 박우(朴祐), 어머니는 김효정(金孝禎)의 딸 해남김씨(海南金氏)이다. 박순의 아내는 고몽삼(高夢參)의 딸 제주고씨(濟州高氏)이다.
[활동 사항]
박순은 1523년(중종 18)에 태어났다. 1540년(중종 35) 식년시를 통해 진사에 입격하였고, 13년 뒤인 1553년(명종 8) 친시(親試)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순의 할아버지 박지흥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에서 생활하였는데, 박순의 어머니 서씨의 친정인 나주와 가까웠기 때문이라 한다. 이후 박지흥의 후손들은 광주 지역과 나주 일대에서 세거(世居)하였으므로, 박순은 비록 나주 출생이나 광주 지역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박순은 명종부터 선조 대까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비롯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병조정랑(兵曹正郞),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등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1561년(명종 16)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로 인해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파출(罷黜)되었다. 이에 한산군수(韓山郡守)에 부임하여 잠시 정리할 시간을 가진 뒤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지냈으며, 1565년(명종 20)에 당시 대사헌 이탁(李鐸)과 더불어 윤원형을 탄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579년(선조 12)에 영의정(領議政)으로 발탁되어 오랜 기간 재직하였다. 명종이 죽은 후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동지관사(同知館事)로 참여하였다.
[학문과 저술]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박순 졸기(卒記)에는 “일찍부터 서경덕에게 수학하고 이황과 교유하였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신혼(神魂)이 아주 상쾌하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이 박순의 문인이다. 『사암집(思菴集)』은 1648년(인조 2) 박순의 외증손 이문망(李文望)이 박순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문집이다. 그 후 박상(朴祥)의 후손인 박원응(朴源應)이 1857년(철종 8)에 중간하였다. 중간본은 7권 3책의 목판본이다.
[묘소]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순은 1643년(인조 21)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에 있는 월봉서원(月峯書院)은 1578년(선조 11)에 고봉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671년(현종 12) 박순과 박상이 배향자 명단에 더하여졌고, 나중에 김장생과 김집이 추가 배향되면서 지금은 5인을 모시고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광곡마을에 있는 월정서원(月井書院)은 1659년(효종 10) 박순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609년(광해군 1) 개성시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 세워진 화곡서원(花谷書院)에는 박순을 비롯하여 서경덕(徐敬德), 민순(閔純), 허엽(許曄)을 모셨다. 화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옥병서원(玉屛書院)은 1658년(효종 9) 박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그 후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이 추가로 배향되었으며, 1713년(숙종 39) 옥병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복원되었으며, 1986년 4월 9일에 경기도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