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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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祐 |
영어공식명칭 | Park Woo |
이칭/별칭 | 창방(昌邦),육봉(六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예문관검열, 강원도감찰사, 개성부유수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박우(朴祐)[1476~1547]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이다. 할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 박소(朴蘇), 아버지는 성균진사 박지흥(朴智興)이고,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부인은 김효정(金孝禎)의 딸 해남김씨(海南金氏)이고, 아들은 박순(朴淳)이다. 박우의 형은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다.
[활동 사항]
박우는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박우의 선대는 충주에서 줄곧 살았으나, 아버지인 박지흥(朴智興) 대에 이르러 광주 지역의 봉황산 일대에서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박우는 1507년(중종 2) 진사에 입격하였고, 3년 뒤인 1510년(중종 5)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우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관직을 시작하여,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서씨가 연로한 관계로 외직을 요청하여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나갔다. 1522년(중종 17)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박우가 중종 대에 역임한 중앙 관직만 하더라도 장령(掌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전한(典翰),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등이다. 이처럼 풍부한 관직 경험을 바탕으로 종종 외직을 맡았는데, 1532년(중종 27)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비롯하여 1536년 공주목사(公州牧使), 1541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1542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1545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하였다. 이렇듯 안팎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중종이 죽은 뒤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수 당시에는 동지사(同知事)로 이름을 올렸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나 『광주읍지(光州邑誌)』, 『호남인물지』 등에는 박우가 김안로(金安老)와 대립이 잦았고 왕의 총애를 받는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외직에 오래 있었다고 적혀 있다.
[묘소]
『국조인물고』에 임억령(林億齡)이 작성한 박우의 묘갈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나주(羅州) 남쪽 마산리(馬山里) 백봉산(白鳳山)에 장례를 치렀는데, 정부인 김씨와 같은 자리에 따로 묻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묘소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박우는 사망한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