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24 |
---|---|
한자 | 東湖洞南洞-靑松沈氏世居地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는 청송 심씨 세거지.
[개설]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 때 사람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심홍부 집안은 세종[재위 1418~1450]의 처갓집으로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척살을 당하면서 주목받은 집안이다. 명종의 비 인순왕후[1532~1575]도 청송심씨이며, 경종의 비 단의왕후[1686~1718]도 청송심씨이므로 조선 왕조 왕비 4명을 배출한 청주한씨, 파평윤씨, 여흥민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겨우 전국 31위의 성씨로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198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세종의 장인은 청송심씨 5세인 심온(沈溫)[1375~1418]으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심종(沈悰)이 동생이다.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沈德符)[1328~1401]는 고려 말 안사공신록에 오르고 청성백에 봉하여진 뒤 조선 개국 후 정종 때 좌정승을 지냈다. 심덕부는 1408년 한성부윤을 지낼 때 딸을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후의 세종]에게 시집보냈다. 태종은 큰아들 양녕대군의 장인 광산김씨 김한로(金漢老)를 유배보내 죽이고 딸의 시아버지 이거이(李居易)도 유배보내 죽인 인물이다. 태종은 친처남인 민무질 3형제를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먹여 죽이기도 하였다.
태종은 광산김씨 김한로의 사위인 큰아들을 세자자리에서 몰아낸 뒤 느닷없이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고 즉시 왕위를 잇게 하였다. 태종은 세종의 장인 심온을 영의정에 임명하여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다. 그 사이 당시 군사령관 자리[도총제]에 있던 심온의 동생 심정(深泟)이 군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사약을 먹여 죽인 뒤 심정의 형이며 사돈인 심온도 귀국 길에 죽였다. 심온의 처 안씨 등은 모두 관비로 삼았다. 태종이 그의 처남들에게 한 과거를 기억하는 청송심씨들은 스스로 화난을 피하여 시골로 숨었다.
심씨들은 세종이 죽은 뒤 세종의 아들이며 심씨 외손자인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사면되었다. 세종의 처남 심회(沈澮)[1418~1493]는 문종 때 사면이 풀려 세조 때 벼슬길을 얻어 예종 때 익재공신이 되어 집안의 재건에 공을 세웠다. 심온의 넷째 형 심징(沈澄)의 아들 심석준은 낙안으로, 손자 심선(沈璿)은 양주 처가로 숨었다. 심온의 셋째 형 심계년(沈繼年)과 아들 심연(沈涓)은 장성 임곡으로 내려와 감찰공파가 되었다. 광산구 동호동 청송심씨들은 심온의 넷째 형인 심징의 후손들이다.
심징의 손자 심선에게 5형제가 있었다. 4남 심안지(沈安智)가 6형제를 낳아 집안이 번성하였다. 큰아들 심순은 곡성에 자리잡고, 다섯째 아들 심풍(沈灃)[1482~1563]은 광산에 자리잡았다. 이 집안은 심풍이 이조정랑을 지냈으나 기묘사화 때 나주로 유배되었다. 심풍의 아들 심광헌(沈光憲)[1541~1593]이 광산 동호에 정착하여 문중을 이루었므로 정랑공파라 한다. 심풍의 묘는 나주시 노안면 보산리에 있다. 심광헌의 묘는 광산구 동호동의 남동에 있다. 남동 선산의 묘제를 위한 경모재(敬慕齋)라는 제각이 있다.
1946년 4세조 심덕부와 심징, 심선, 심풍, 심광헌 등 다섯 사람을 모신 사우 동호사(東湖祠)가 있고, 한말 유학자인 심한구(深翰求)의 영당과 만취정, 호은정, 청송정 등 정각이 있다. 전통 있는 동네답게 마을 어귀와 정각, 사우 일대의 노거수가 명품이다. 동호동은 본 마을인 본촌, 신촌, 용호, 남동의 네 동네로 이루어져 있고, 본촌과 남동에 심씨들이 몰려 살고 있다. 심광헌이 이 동네에 처음 들어왔다면 그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대일 것이다.
[현황]
청송심씨 49가구와 타성씨 2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