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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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秉世 |
영어공식명칭 | Jo Byeongse |
이칭/별칭 | 치현(穉顯),산재(山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현채 |
출생 시기/일시 | 1827년 - 조병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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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59년 - 조병세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75년 - 조병세 이조참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77년 - 조병세 예방승지·성균관대사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조병세 의주부윤, 이조참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조병세 사헌부 대사헌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7년 - 조병세 도승지, 공조판서 역임, 동지정사로 선발되어 청국 방문 |
활동 시기/일시 | 1888년 - 조병세 예조판서, 이조판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9년 - 조병세 우참찬,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우의정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3년 - 조병세 좌의정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05년 - 조병세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 조병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묘소|단소 | 조병세 묘 -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
사당|배향지 | 삼충단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488-1 |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면 |
성격 | 문신|순국지사 |
성별 | 남 |
본관 | 양주 |
대표 관직 | 우의정|좌의정|성균관대사성|사헌부 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중추원 의장 |
[정의]
1910년 경기도 가평군에 세운 삼충단에 배향된 순국지사.
[가계]
조병세(趙秉世)의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유순(趙有淳)이며, 1827년 경기도 가평군 가평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조병세는 음관(蔭官)으로 종9품의 참봉이 되었고,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지냈다. 1861년(철종 12)에는 사간원헌납(獻納)을 역임했고, 1864년(고종 1)에는 홍문관부교리로 활동하였다. 그 해에 실록청(實錄廳) 도청낭청(都廳郞廳)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관여하였고 가자(加資)를 받았다. 1874년(고종 11)에 함경도 암행어사로 현지를 다녀왔고, 1875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1877년에는 예방승지·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받았고, 완화군 이선의 관례에 빈(賓)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878년에는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선발되어 청에 다녀왔으며, 1883년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85년에도 진주(陳奏)부사로 임명받았으나 체직(遞職)을 상소하여 이중철로 대신하였고, 사헌부대사헌으로 임명받았다. 1887년에는 도승지와 공조판서를 거쳤고,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선발되어 청에 다녀왔다. 귀국 후인 1888년에는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1889년 우참찬(右參贊)을 겸하였다. 겸임하던 이조판서직에서 파면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되었고, 곧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 해에 김홍집·김병시 등과 함께 영조의 묘호를 ‘영종(英宗)’에서 ‘영조(英祖)’로 올리도록 건의하여 묘호도감(廟號都監) 및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의 도제조(都提調)를 담당하였다. 이 즈음부터 조병세는 주로 왕릉의 의전 문제에 관여하였다. 1890년에는 판중추부사로 조정에서 활동하다가 1892년에 우의정으로 다시 복무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893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의 관제 개혁으로 정1품을 받아 활동하다가 사직하고 가평으로 은거하였다.
1896년에 총호사(總護使)로 조정에 부임하였으며, 1897년 함녕전에서 시임의정 및 원임의정들과 함께 칭제건원을 주장하였다. 이후 총호사와 궁내부특진관을 전전하다 1898년 의정부 의정으로 임명받았으나 사임하고 특진관으로 계속해서 복무하였다. 1902년에 잠시 중추원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궐 밖으로 추방당하였고, 이후 심순택·이근명 등과 함께 을사조약의 철회와 조약을 체결하게 한 을사오적을 벌하라는 연명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병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민영환(閔泳煥)의 뒤를 이어 12월 1일 음독자살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병세의 상소문 초본은 조병세의 사후 사위인 이용직이 고종에게 바친 판본이 『고종실록』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조병세의 사망 소식을 듣자 고종은 1905년 12월 1일, 조령을 내려 그의 가족을 지원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다음날에는 대훈위(大勳位)에 추증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주었다.
이후 경기도 가평군에 세운 삼충단(三忠壇)에 배향되었다. 해방 후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