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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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泳煥 |
영어공식명칭 | Min Yeonghwan |
이칭/별칭 | 문약,계정,충정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근하 |
출생 시기/일시 | 1861년 - 민영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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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민영환 성균관 대사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민영환 특명전권공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8년 - 민영환 표훈원총재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05년 - 민영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05년 - 민영환 시호 충정(忠正) 하사 |
추모 시기/일시 | 1905년 - 민영환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의정대신으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910년 - 민영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삼충단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민영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묘소|단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7 |
사당|배향지 | 삼충단 -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488-1 |
성격 | 문신|순국지사 |
성별 | 남 |
본관 | 여흥 |
대표 관직 | 특명전권공사|의정부참정|군부대신|표훈원총재 |
[정의]
1910년 경기도 가평군에 세운 삼충단에 배향된 순국지사.
[가계]
민영환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민단현(閔端顯)이며, 할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이자 고종의 외할아버지인 민치구(閔致久)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민겸호(閔謙鎬)이며, 어머니는 대구 서씨 서경순(徐庚淳)의 딸이다. 훗날 민태호(閔泰鎬)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첫째부인은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안동 김씨 김명진(金明鎭)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박용훈(朴龍勳)의 딸이다.
[활동 사항]
민영환(閔泳煥)[1861~1905]은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1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1882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발발한 임오군란으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제수되며 관직에 복귀하였다. 민영환은 1884년부터 1887년까지 도승지(都承旨),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내무부협판사(內務府協辦使), 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개성유수(開城留守), 친군기연해방영사(親軍畿沿海防營使), 해방총관(海防總管), 친군연해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 한성우윤(漢城右尹),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가상존호도감 제조(加上尊號都監提調),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호조판서(戶曹判書)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 또는 겸임하였다. 특히 개성유수, 친군기연해방영사, 해방총관, 친군연해방어사 등은 모두 강화도의 군비(軍費)와 조세 문제를 직접 담당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강화도의 군비 문제 해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에도 민영환은 계속 여러 직임을 수행하였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고, 1893년에는 형조판서(刑曹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1894년에는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다가, 1895년 갑오을미개혁으로 내각의 개편이 단행된 이후에는 종1품으로서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이자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임명되었고, 8월에는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되어 주미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민영환은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이듬 해인 1896년 4월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귀국한 후 고종을 인견하고 러시아가 군무와 교육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하며 조선에서도 이를 배워야한다고 하였다.
1897년 1월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다.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였으며, 귀국하는 길에 손병균(孫炳均), 김병옥(金秉玉) 등과 함께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처럼 해외 여행을 통해 각국 서구 열강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후원하였다.
이후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 참정대신, 탁지부대신 등에 임명되었다. 민영환의 건의에 따라 설치된 원수부(元帥府)의 회계국총장(會計局總長), 장례원경(掌禮院卿), 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 헌병사령관(憲兵司令官) 등을 역임하였다. 표훈원총재로 외국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업무를 맡아 1901년에는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했던 프랑스인들에게 훈장을 주기도 했다. 이 시기에 민영환도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 등을 받았다.
1904년 이후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과 친일 내각에 대립하여 한직인 시종부무관장(侍從府武官長)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에 참정대신, 외무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났다. 이 때 민영환은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을사조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하여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을사조약에 찬동한 대신들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민영환은 스스로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렸다. 이에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대한제국 재판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이후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민영환은 세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하나는 국민의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 다른 하나는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 또 다른 하나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민영환의 자결 이후 원임대신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주영서리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李漢膺),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종은 민영환의 자결을 안타까워하며 장례를 지원하고 가족들에게 위로의 사신을 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학문과 저술]
민영환의 유고 중 대표적인 것은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그밖에 많은 소(疏)와 차(箚) 등이 있다.
[묘소]
민영환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7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5년에 민영환이 자결하자 고종은 즉시 민영환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예우를 갖췄다. 이 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으로 추증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다시 ‘충정(忠正)’으로 고쳤다.
1910년에는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의 삼충단(三忠壇)에 조병세, 최익현과 함께 배향되었다. 해방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