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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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範九 |
영어공식명칭 | I Beomg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엄소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성운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 이범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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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896년 - 을미사변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이범구 을미의병 활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7년 - 정미칠조약 체결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이범구 정미의병 활동 |
활동지 | 이범구 의병 활동지 - 경기도 가평 |
묘소 | 이범구 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엄소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을미의병|정미의병 참여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이범구(李範九)의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아버지는 가선대부 겸 오위장 이상용(李商用)이다.
[활동 사항]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충응(李忠應)은 강백룡(姜白龍) 등과 함께 이소응(李昭應)이 이끄는 춘천의병의 아장(亞將)으로 가평에서 봉기하였다. 이범구는 이충응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정미칠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범구는 정미의병에 참여하여 뜻을 함께하는 동지 30여 명을 이끌고 소모대장(召募大將)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이관구(李觀九) 등과 함께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천지방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으며, 1909년에는 이관구, 신봉학, 김춘수 등과 가평군 설악면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일본군은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그의 가족들을 고문하고 그의 집을 불태웠다.
[묘소]
이범구의 묘는 가평군 설악면 엄소리 우미터골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