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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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주혁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군 일대에서 전개된 항일 의병 전쟁.
[내용]
1896년 이후 가평의 의병활동은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인근 지역인 춘천 및 이천 의병과 연합하여 펼쳐나갔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단발령까지 시행되자 전국의 의병항쟁은 본격화되었다. 의병항쟁 초기에 경기도 북동부 지역의 가평군은 춘천·화천과 함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가평의 의병은 1896년 1월 20일 춘천과 화천 등에서 이수춘·유홍석·김경달·민영문 등이 봉기하자, 이에 연대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가평 출신인 이충응(李忠應)·신재희(申在喜)·신경홍(申敬弘) 등이 고을 곳곳마다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보내어 춘천 지역 의병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결의한 뒤 춘천 남면 창촌리 이소응(李昭應)을 찾아가 합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의병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조인승(曺寅承)을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삼아 춘천에 파견하였다. 조인승은 춘천으로 향하는 도중에 가평에 이르러, 춘천 관내에 집결한 의병들의 기세와 형세를 듣자 춘천에 가지 못하고 읍내에 체류하였다. 당시 춘천을 점령하고 있던 의병들은 결국 읍내에 있던 조인승을 잡아 사형시켰다. 이에 놀란 조정은 토벌대를 보내 의병의 전면적 진압에 나섰다. 이들이 가평에 도착한 것이 바로 1896년 2월 22일이었다. 의병과 관군이 가평읍 앞산인 보납산(寶納山)에 진을 치고 서로 대치하였다. 가평 의병과 춘천 의병은 힘을 합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 부족과 훈련 부족 등으로 패하고 말았다.
1896년 5월 경 관군의 토벌작전은 곳곳에서 이어졌다. 의병 일부는 가평 북면 화악리 일대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였고 유중락·유홍석·김경달 등 가평 일대에서 유격전을 수행하던 의병들은 유인석(柳麟錫)의 제천 의병에 합류하여 활동을 지속하였다. 을미의병 시기에 봉기한 가평 의병장 중 지도자였던 의병 대장 이충응·부대장 신재희·의병장 정문위 세 사람은 의병활동 중에 순국하였다. 공훈록 등 정부기록물에 31명의 순국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의병활동 이외에 가평 출신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의정부 좌의정을 지낸 조병세(趙秉世)는 고향인 청평면 청평리에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 고종 앞에서 반대하다가 이미 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얼마 뒤 극약을 먹고 순절하였다. 이렇듯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 가평 지역에서도 집단적인 의병항쟁과 순국 등 강력한 저항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