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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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加平義兵三一抗日運動紀念碑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문화로 133[대곡리 466]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윤주한 |
[정의]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에 있는 항일 의병과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
[건립 경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사건과 더불어 시행된 단발령은 조선 민중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평 지역에서도 1895년 의병이 봉기하였다. 가평군 북면을 근거지로 한 약 380여명의 가평 지역 의병들은 강원도 의병과 연합하여 전투하였다. 의병 전투에서 의병장 이충응(李忠應)[1856~1896], 신재가(申在嘉)[1850~1895], 정문위(鄭文緯)[1851~1896] 등이 순국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가평군에서는 3월 15일에 첫 만세 시위가 있었다. 3월 15일 오전 9시에 수백명의 가평군 북면 주민들이 북면사무소에 집합하여 구한국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가평읍내로 출발하였다. 가평군수와 헌병 소장은 해산을 명령하고 제지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정오에 가평읍내로 진입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가평군청, 가평공립보통학교[현 가평초등학교], 가평금융조합, 가평 헌병 분견소, 처노교구실, 가평우편소, 군내면사무소 등 여러 곳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수십 명은 가평 헌병 분견소에 체포되었다. 다음 날인 3월 16일에는 가평 헌병 분견소에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약 200여 명의 군중이 북면 목동리에 다시 모였다. 해산을 명령한 헌병들과 격투를 벌이는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가평문화원과 가평 의병 3·1운동 기념 사업회는 1895년에 일어난 을미의병 항쟁과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가평군민들의 의로운 행동을 기억하기 위하여, 군민 모금을 전개하여 1994년 3월 1일에 가평 3·1 의병 항일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가평의병·삼일항일운동기념비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문화로 133에 위치한 공설운동장 뒷편에 있다.
[형태]
가평의병·삼일항일운동기념비는 화강석과 오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비의 높이는 3m이다.
[금석문]
가평의병·삼일항일운동기념비의 왼쪽 면에는 의병 항쟁에 참여한 38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오른쪽 면에는 3·1운동 당시 가평 헌병 분견소에 투옥되었던 2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건립 당시 가평문화원장이었던 신영범과 부회장 정동섭이 작성한 ‘역사는 증언한다’는 제목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비 옆에는 기념비 성금 기탁자 비석을 건립하여 기념비 건립에 성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현황]
1919년 가평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날짜인 3월 16일에 매년 항일 의병 항쟁과 3·1운동에 참여한 선인들을 위한 기념 행사가 개최되고 있었다. 2017년부터는 ‘가평 3·15 독립 만세운동 재현’라고 하는 가평 문화원이 주최하는 행사를 계기로 매년 3월 15일에 기념 행사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