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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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普賢寺朗圓大師塔碑 |
영어음역 | Bohyeonsa Nangwon Daesa Ojintapbi |
이칭/별칭 | 보현사 낭원대사 오진탑비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보광리 산 544번지]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흥삼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보물 제192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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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보물로 재지정 |
성격 | 탑비 |
건립시기/연도 | 940년경 |
관련인물 | 개청(開淸) |
비두재질 | 화강암 |
비좌재질 | 화강암 |
너비 | 98㎝ |
비신두께 | 20㎝ |
높이 | 188㎝ |
비신재질 | 점판암 |
비문찬자 | 최언위(崔彦撝) |
비문서자 | 구족달(仇足達) |
비문각자 | 임문윤(任文尹)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보광리 산 544번지] |
소유자 | 보현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고려 초기 승려 개청(開淸)의 탑비(塔碑).
[개설]
비의 원명은 ‘고려국명주보현산지장선원낭원대사오진탑비’이다.
[건립경위]
개청은 930년 9월 24일에 96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입적한 지 5일 뒤인 28일에 보현사에서 300보쯤 떨어진 서봉(西峰) 석실(石室)에 장사를 지냈다. 신경(神鏡)·총정(聰靜) 등의 제자와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여러 번 표(表)를 올려 시호와 탑호를 내려줄 것과 비문을 찬(撰)해 달라고 조정에 아뢰었다. 10년 뒤 태조가 삼한(三韓)을 평정한 뒤에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하면서 최언위(崔彦撝)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다. 글씨는 명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형태]
비석의 귀부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놓여 있는데, 머리는 용머리 같이 조각하였다. 거북등[龜甲]은 6각형의 벌집모양으로 표현되었다. 등 중앙에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신(碑身)을 세웠다. 비신의 상단(上端)에는 앙련(仰蓮) 받침이 있고, 이수(螭首)는 구름 가운데 쌍룡(雙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모습인데 실감나게 투각(透刻)하였다. 이수 중앙에 편구형(扁球形) 복발(覆鉢)과 1단의 보륜(寶輪)을 갖추고 그 위에 화염(火焰)에 쌓인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었다.
[금석문]
비신(碑身)에는 보현사를 중건한 개청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개청은 835년에 지방세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화엄사(華嚴寺)에 출가해 교학(敎學)을 익혔다. 26세에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굴산문(掘山門)의 개조(開祖)인 범일(梵日)의 제자가 되었다. 범일이 입적한 후 굴산사(掘山寺)를 지켰으나 자주 초구(草寇)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때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도움으로 보현산사(普賢山寺)로 옮겼다. 지명주군주사(知溟州軍州事)인 왕순식(王順式)의 협조도 받았고, 경애왕(景哀王)이 국사의 예(禮)를 표하였다. 930년 보현사에서 입적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비는 시대와 크기 및 수법에 있어 영동지방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9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