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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070
한자 張鉉瑾
영어음역 Jang Hyeongeun
이칭/별칭 송진표(宋鎭杓),명옥(鳴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79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790 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9년연표보기
몰년 1969년연표보기
본관 옥구
대표경력 한인청년단 이사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장현근은 190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에서 장원기(張遠基)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옥구, 자는 명옥(鳴玉), 이명(異名)은 송진표(宋鎭杓)이다. 개성상업학교 재학 중에 의주 신조준(申肇峻)의 딸 신정숙(申貞淑)과 결혼하였는데, 장인 신조준은 만주에서 독립 항쟁한 인물이다.

[활동사항]

1926년 개성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학교 운영이 일본인 위주인 것에 저항하다가 퇴학당하였다. 그 후 홍익단원 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27년 장현근의 친형 장현팔(張鉉八)이 운영하는 전라북도 정읍의 토리교회(土里敎會)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9년 9월 안창호의 부름을 받고 1931년 11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상해 교민단 서기, 의경대(義警隊) 간사, 한인청년단 이사 겸 서무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뒤에 일본 경찰의 검거 열풍으로 상해의 불조계(佛租界)에서 안창호, 김덕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2년 6월 7일 국내로 호송되어 일본 경찰의 심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안창호가 “장현근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른다”고 극구 부인하였고, 장현근은 옥고를 겪다가 1932년 7월 25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김구의 비서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1937년 이후에는 상해,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69년 5월 19일 향년 61세로 별세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32년 4월 한인청년단 기관지 『성종(醒鐘)』에 「친왜파는 속시에 반성하라(親倭派는 速時에 反省하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친일파에게 경종을 울렸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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