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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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近 |
영어음역 | Gwon Geun |
이칭/별칭 | 권진(權晉),가원(可遠),양촌(陽村),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용만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증조부는 권부(權溥)이다.
[활동사항]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옥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조선왕조에 출사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등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정종 때는 정당문학·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 혁파를 건의하여 단행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학문과 사상]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하여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문교 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삼아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여,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조선왕조 유학의 토대를 닦는데 공헌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였으며,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40권이 있다.
[묘소]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