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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691
한자 鄭敾
이칭/별칭 원백(元伯),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76년연표보기 - 정선 생
활동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 정선 한성 부주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59년연표보기 - 정선 졸
묘소 정선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구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
성격 화가
성별
본관 광산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도」를 그리고, 도봉 지역에 안장된 화가.

[개설]

정선(鄭敾)[1676~1759]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이다. 조선 후기에 조선의 실경을 그렸던 화가로, 도봉 서원의 실제 모습을 그린 「도봉 서원도」가 있다. 정선은 생전에 미리 경치 좋은 곳으로 정해 두었던 양주(楊洲) 해등촌면(海等村面) 계성리(鷄聲里)[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영면(永眠)하였다.

[활동 사항]

정선의 집안은 사대부 가문인데 증조할아버지인 정창문(鄭昌門)이 벼슬길에 나아기지 못해 조락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의 장토(庄土)는 후손들에게 분배되면서 영세화되었고, 정선이 14세가 되던 1689년에 정선은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적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몰락하면서 낙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선은 과거로 벼슬길에 나갈 희망을 버리고 화도(畵道)에 입문하게 되었다. 정선은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과 더불어, 김창흡을 중심으로 하여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세거하던 서인 자제들이 일으켰던 삼연학풍(三淵學風), 즉 학예(學藝)를 겸수하며 진경 시문학(眞景詩文學)의 학풍의 영향을 받아 진경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정선은 어려서부터 백악산 아래 살면서 화흥(畵興)이 일면 문득 산을 대하여 사생했다고 한다. 거기에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계 학풍의 사상적 기반 아래 조선 중화 의식(朝鮮中華意識)을 과감하게 실천하기 위해 일체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관조(觀照)하고 거기서 체득한 이치를 체계화시키면서 진경 산수화풍을 완성하였다. 정선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왕세자를 호위하는 위수(衛率), 1729년에는 한성부 주부를 지냈고, 1734년에는 청하 현감을 지냈다.

경상도 동해변 청하현은 정선의 진경 산수화풍을 완결 지을 수 있는 관동 팔경을 마음껏 사생할 수 있는 장소로, 청하 현감직을 제수한 것은 영조의 배려였다. 이후 자연 현감과 하양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며,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訓練都監郎廳)을 거쳐, 1740년부터 4년여 간 양천 현령을 지냈다. 1754년에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756년에 종2품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정선은 지방 관직으로 나가 있을 때에도 화도 정진(畵道精進)을 쉬지 않아 전국에 화명(畵名)을 떨치게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정선은 사대부 출신의 화가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다른 화가들보다는 기록이 많으며, 남아 있는 작품 수도 상당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이 있다. 도봉 서원의 모습을 그린 「도봉 서원도」 역시 정선의 작품인데, 그 소장처와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인계 학자들과 긴밀히 교류하고 있던 그의 교유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정선은 서인계 학자들의 수학처(修學處)였던 도봉 서원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인연으로 도봉 서원에 머물면서 그곳을 사생(寫生)했을 것으로 보인다.

[묘소]

1759년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난 정선양주 해등촌면 계성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정선이 생전에 마련해 둔 경치 좋은 곳이었다. 정선의 손자인 정황(鄭榥)이 그린 「양주 송추도(楊洲松楸圖)」를 통해 정선 묘소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상훈과 추모]

80세 이상 관원에게 내려주는 관직인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종2품의 품계에 올라 있던 정선은, 사후 13년 만인 1772년에 효행의 표본이라는 명목으로 품계가 다시 정2품에 올랐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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