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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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恬 |
이칭/별칭 | 회산군(檜山君),보익당(輔翼堂),정간(貞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출생 시기/일시 | 1481년 - 이염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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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06년 - 회산군 중종반정에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512년 - 이염 졸 |
묘소|단소 | 회산군 이염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 |
사당|배향지 | 영모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 |
성격 | 왕족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왕족.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보익당(輔翼堂).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홍일동(洪逸童)의 딸 숙의 홍씨(淑儀洪氏)이다. 안방언(安邦彦)의 딸 영원 군부인(寧原郡夫人) 죽산 안씨(竹山安氏)와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활동 사항]
이염(李恬)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아버지 성종의 마음을 잘 헤아려 조심불변(操心不變)하고 산회지청직(山檜之靑直)하라는 뜻에서 회산군(檜山君)으로 특별히 봉군되었다. 또한 성종은 이염을 위해 정광필(鄭光弼)에게 스승이 될 만한 학자를 추천하도록 하여, 김굉필(金宏弼)을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환후가 위중해졌을 무렵, 성종은 옆에서 병수발을 들던 회산군에게 연산군 즉위 후 정치가 어지럽게 되면 직간하고 영의정 정광필과 상의할 것을 유교(遺敎)로 남겼다고 한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김종직(金宗直)과 그 문하인을 처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궐하여 논죄하지 말 것을 직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고 오히려 노하였다. 회산군은 자신의 스승 김굉필을 구원하고자 연산군의 왕비인 거창 군부인 신씨에게 부탁하여 김굉필에 대한 처벌이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1500년(연산군 6) 6월 국정을 새로이 할 것을 간하였으나, 연산군은 이염을 사사하려 하였다. 대비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구제로 이염은 죽음을 면하였으나, 실망한 나머지 사사받은 궁전(宮田)을 되돌려 바쳤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였으며, 연산군이 폐위된 뒤 노비와 전답을 돌려받고 정현 왕후가 사저를 지어 주며 왕을 잘 도우라는 뜻에서 ‘보익당(輔翼堂)’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아 ‘한일재상(閑逸宰相)’이라 불렸다. 1512년(중종 7) 병세가 깊어지자 중종이 내의(內醫)를 보내 진료케 하였으나 결국 3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염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중종이 특별히 명하여 견성군(甄城君)의 둘째 아들 계산군(桂山君)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묘소]
회산군 이염 묘역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 최상단에 이염의 묘가 있고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가 이어 조성되어 있다. 이염 묘는 쌍분으로 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동자석·문인석 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묘표에는 ‘회산군지묘(檜山君之墓)’, ‘영원 군부인 안씨지묘(寧原郡夫人安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회산군파 종회에서는 1933년에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무봉리에 사당인 영모재(永慕齋)를 세웠다가, 1968년 3월에 현재 위치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회산군 묘 아래로 옮겨 세웠다. 영모재에서 매년 음력 4월 5일과 11월 4일에 회산군 기신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