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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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檜山君李恬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대남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481년 - 회산군 이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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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512년 - 회산군 이염 사망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512년 - 회산군 이염 묘표 건립 |
현 소재지 | 회산군 이염 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 |
성격 | 묘 |
관련 인물 |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1481~1512]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전주 이씨 회산군파 묘역에 있는 조선 전기 성종의 다섯 째 아들 회산군 이염의 묘.
[개설]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1481~1512]의 호는 보익당(輔翼堂)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어머니는 숙의(淑儀) 홍씨(洪氏)로 안방언(安邦彦)의 딸이다. 1500년(연산군 6) 연산군에게 직간하다가 형 안양군(安陽君)과 동생 봉안군(鳳安君)은 죽고, 회산군만이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 대비의 만류로 궐문 밖으로 방면되었다. 1506년(중종 1) 아우인 영산군(寧山君) 및 중신들과 반정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중종의 즉위로 사면되었다. 영원 군부인(寧原君夫人) 죽산 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다.
회산군 이염은 자손들에게 왕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공정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중종 대 대신 김안로(金安老)가 간교한 말로 왕에게 간언하자 면전에서 크게 꾸짖어 물리치기도 하였다. 아들이 없어 중종이 회산군의 아우인 견성군(甄城君)의 둘째 아들 계산군(桂山君) 이수계(李壽誡)로 후사를 잇게 하였다.
[위치]
회산군 이염 묘(檜山君李恬墓)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85-1에 위치한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 3동 극동 아파트 101동 왼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능선 좌측으로 내려가 신동아 아파트 21동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북쪽에 전주 이씨 회산군 묘역이 있다.
[형태]
묘는 쌍분이고, 좌향은 동남향이다.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인, 문석인 등을 갖추었다. 묘표는 이수 방부형 2면 비이다. 이수 앞면에는 이무기 한 마리가 여의주를 잡고서 바라보고 있으며, 주변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뒷면에는 중앙의 하단부에 반달 형태로 보이는 반원을 조각하고, 그 주변을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이수의 가장 아랫단에는 사방으로 파도무늬를 돌려 이무기가 파도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하였다. 비신은 45×15×120㎝ 규모이다.
문인석은 복두 공복(僕頭公服)을 착용하였다. 허리 뒤의 대대에 화문을 조각하고 야대(也帶)를 표현하였다. 총 높이는 230㎝이다. 특히 동자석인은 쌍계를 갖추고 양손에 꽃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꽃의 형태를 달리하여 조각하였다. 동자석인은 1512년(중종 7)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도상을 수용하여 묘 동자석인으로 적용한 초기 사례로서 매우 중요한 석물이다. 규모는 총 높이 110㎝이다. 각 석물들은 회산군 이염이 중종의 동생의 신분으로 중종반정 이후 조성된 것이라 품격 있는 솜씨를 보이고 있다.
[금석문]
회산군 이염의 묘표에 소략한 명문이 남아 있다. 비신 앞면에는 ‘회산군 지묘 영원 군부인 안씨 지묘(檜山君之墓 寧原郡夫人安氏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황명 정덕 칠 년 윤오월 십일 일 립(皇明正德七年閏五月十一日竪)’이라 새겨 1512년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황]
전주 이씨 회산군파 묘역에 속하여 후손들에 의해 비교적 관리가 잘되어 있다. 석물의 조각이나 문양이 매우 양호하여 조선 초의 석물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동자석인은 16세기 묘제 석물의 변화 양상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종친에서도 이를 적극 수용하였음을 방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