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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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昌煥 |
영어공식명칭 | Yoo Changhwan |
이칭/별칭 | 명환(明煥),주백(周伯),준백(準伯),옥계(玉溪),우당(愚堂),육일거사(六一居士),홍엽산방주인(紅葉山房主人),성동초자(城東樵者)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민균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10월 8일 - 유창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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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유창환 귀향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유창환 부흥학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유창환 상경 |
활동 시기/일시 | 1923년 - 유창환 조선교육협회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부터 - 유창환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
몰년 시기/일시 | 1935년 3월 19일 - 유창환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 우당 유창환 유묵전 전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6년 12월 7일 - 규암 유창환 및 유치웅 묘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34호 지정 |
출생지 | 충청남도 부여현 옥계 -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
묘소 | 규암 유창환 및 유치웅 묘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함양로94번길 40-9[함양리 180-3] |
성격 | 서예가 |
성별 | 남성 |
본관 | 기계(杞溪) |
대표 경력 | 정6품 승훈랑|조선교육협회 설립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근대 문인이자 서예가.
[개설]
유창환(兪昌煥)[1870~1935]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초명은 명환(明煥), 자는 주백(周伯)·준백(準伯), 호는 옥계(玉溪)·우당(愚堂)·육일거사(六一居士)·홍엽산방주인(紅葉山房主人)·성동초자(城東樵者)이다. 아들은 서예가인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1901~1998]이다.
유창환은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문인이자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며 금석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유창환의 글씨는 각 체에 두루 능하였는데, 특히 초서에 뛰어나 ‘초성(草聖)’ 또는 ‘추사 김정희 이후의 일인자’라고 칭송받았다.
[활동 사항]
유창환은 1870년 10월 8일 충청남도 부여현 옥계[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1902년 정6품 승훈랑에 올라 처음 관직을 가졌으나, 1904년 일제가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대한제국의 협력을 강요하며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부여로 돌아왔다. 유창환은 교육으로 민족에 기여하고자 1907년 부흥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1912년 유길준과 유진태의 설득으로 다시 상경하였고, 1913년 이세영·이장용 등과 함께 광복 활동을 펼치고자 하였다가 발각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3년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여 교육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유창환은 전수한 스승은 없었지만 초서는 물론 전서와 예서에도 능하였다. 1925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여러 번 입선하였다. 1935년 3월 19일 사망하였다. 1976년에는 당시 대한민국학술원장, 대한민국예술원장, 국립중앙박물관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추진 위원이 되어 ‘우당 유창환 유묵전’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창환과 관련한 저술로는 아들 유치웅이 1980년 간행한 『우당선생유고(愚堂先生遺稿)』가 있고, 유묵으로는 역시 유치웅이 1969년 발간한 『유우당선생유묵(兪愚堂先生遺墨)』이 있다. 필적으로는 경상남도 사천의 「침산정기덕비(枕山亭紀德碑)」, 서울의 「이종석송덕비(李鍾奭頌德碑)」와 「한규설묘표(韓圭卨墓表)」 등이 있다.
[묘소]
유창환의 묘소는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산13-1에 있으며, 아들 유치웅의 묘소와 함께 ‘규암 유창환 및 유치웅 묘’라는 명칭으로 2016년 12월 7일 부여군 향토문화유산 제13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