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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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應起 |
영어공식명칭 | Jang Eungki |
이칭/별칭 | 한계(寒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승환 |
[정의]
조선 후기 부여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활동 사항]
장응기(張應起)[?~?]의 호는 한계(寒溪)이다. 장응기는 부여 지역에 세거하면서 학문을 전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장응기는 경전에 매우 밝고 학당을 열어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여 문하에서 다수의 선비가 배출되었다. 또한 효도와 우애를 행실의 근본으로 삼아 여러 번 관직 추천장에 이름이 올랐다.
장응기는 학관(學官)으로서 공자를 모신 사당인 성묘(聖廟)를 지키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여현 백성들이 달아났다. 그러나 장응기는 홀로 향교에 거처하면서 향교 소속 노비를 데리고 성묘에 들어가 통곡하면서 오성(五聖)과 제현(諸賢)의 위패를 받들고 나왔다. 장응기는 산골짜기의 깨끗한 땅을 가려 구덩이를 파고 항아리에 위패를 묻어 보관하였다.
왜군이 물러가자 장응기는 초막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부여현감 신탁(申濯)이 충청감영에 보고하였다. 관직을 제수하라는 선조의 명이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장응기는 사망하고 말았다. 장응기의 후손은 역병으로 모두 죽었다.
부여현 의열서원(義烈書院)의 원생 박동수 등이 장응기에게 후사가 없음을 알고 위패를 묻은 일이 자기 할아버지가 한 일인 것처럼 꾸며 관직과 포장(襃獎)을 받은 일이 있었다. 충청감사였던 홍계희(洪啓禧)가 이를 수상하게 여기고 부여현감 이익현(李益炫)에게 조사하라고 하였다. 결국 박동수가 조작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1755년(영조 31) 4월 27일, 형조판서에 오른 홍계희가 영조에게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장응기의 학문과 행적이 표창하기에 합당하다고 말하였다.
[상훈과 추모]
1761년(영조 37) 6월 21일 홍계희의 상소로 영조가 장응기에게 호조낭청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