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53 |
---|---|
한자 | 沙宅智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고위 관리.
[가계]
사택지적(砂宅智積)[?~?]은 백제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이자 사비 시기에 왕실 외척으로 급부상한 귀족 가문인 사씨로 나지성(奈祗城) 출신이다. 사택지적의 사택씨(沙宅氏)는 사탁씨(沙矺氏) 또는 사탁씨(沙乇氏)라고도 불리며, 단일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이다.
[활동 사항]
사택지적은 사비 도읍기인 의자왕 대 대좌평(大佐平)을 지냈다. 백제가 왜에 파견한 사신 가운데 최고위직이었다. 642년(의자왕 2)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8월에 귀국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皇極紀) 원년인 642년 2월 조에 의하면, 일본에 파견된 백제 조문사가 641년 11월 대좌평 지적이 죽었다는 보고를 한 내용이 확인되며, 7월 조에는 왜에서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智積) 등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연회가 끝난 뒤 사택지적은 백제에서 추방된 교기를 찾아가 문 앞에서 절하였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을 사택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으로 볼 때, 642년(의자왕 2)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뒤, 654년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사택지적이 관직에서 물러난 배경에 대해서는 642년 의자왕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48년 부여읍 관북리에서 발견된 보물 부여 사택지적비(扶餘 砂宅智積碑)는 사택지적이 만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저술 및 작품]
사택지적은 654년 「사택지적비문」을 썼다.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지성(奈祗城)의 사택지적은 몸이 세월과 함께 쉽게 가 버리고, 다시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프게 여기노라. 이에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우뚝 솟은 그 자애로운 위용은 신광을 토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높디높은 그 자비로운 모습은 성명(聖明)을 머금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