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25
한자 李基定
영어공식명칭 I Gijeong
이칭/별칭 충부(忠夫),이재(邇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7월 5일연표보기 - 이기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이기정 성주읍 장날 만세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20일 - 이기정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21일 - 이기정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남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이기정 군자금 모집 활동으로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복역
몰년 시기/일시 1955년 3월 15일연표보기 - 이기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기정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이기정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2길 22-114[대산리 30]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기정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활동지 이기정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파리 장서(巴里長書)[독립 청원서]에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여 파리 장서 운동[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1919년 신문을 통해 전국 각지의 3.1 운동 소식을 보고 있던 차에 고종 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돌아온 이기원(李基元)으로부터 서울 소식을 듣고, 성주읍 장날 만세 운동을 결심하였다.

이어 이웃 마을의 송인집(宋寅輯) 등 경상북도 성주 지역 유생들과 함께 군민들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운동을 일으켜 연행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1926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창숙의 뜻에 따라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충부(忠夫), 호는 이재(邇齋). 고려 개국공신 성산백(星山伯) 이능일(李能一)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이용희(李鏞熙)이다.

[활동 사항]

이기정(李基定)[1883~1955]은 1883년 7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2길 22-114[대산리 30]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예가 남달랐다. 일찍이 족친인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와 면우(俛宇) 곽종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박식함이 향리에 두루 알려졌다.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에 협력한 다섯 명의 역적 대신들을 성토하고 참형을 주장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단식 투쟁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구국 방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전념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김창숙 등이 영남 유림의 큰 학자 곽종석을 앞세워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 강화 회의에 파리 장서를 제출하려는 파리 장서 운동을 추진하였다. 파리 장서는 프랑스 파리에 보내는 긴 문장의 편지라는 의미인데, 일제의 부당한 국권 침탈과 강점 등을 폭로함과 동시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 한국 유림을 대표하여 137명이 연서했는데, 이기정도 그 서명자들 중 한 사람이다.

당시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는 송준필(宋浚弼)·장석영·김창숙·송홍래(宋鴻來)·이기형(李基馨) 등이 함께 연락 본부를 초전면 고산리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으로 정하였다. 여기서 서명한 다음, 다른 지역 유생들의 서명을 받아 김창숙에게 중국 상하이로 가져가게 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의 주역 김창숙은 1919년 3월 15일 파리 장서와 유림 대표 연명부를 가지고 경상남도 거창에서 곽종석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로 가서, 다시 김복한(金福漢) 등 기호 유림 측의 파리 장서와 통합한 뒤, 3월 23일 용산역을 출발하여 열차로 중국 상하이로 갔다. 파리 장서는 파리 강화 회의 의장과 파리에 특파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우송되었다.

한편, 1919년 3월 29일 성주 백세각에서 송준필이 작성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지로 배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개신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 동포리의 개신교도 오의모(吳義模) 등과 약속하여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를 함께 펼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개신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며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갔다.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의 송우선(宋祐善), 송회근(宋晦根), 송수근(宋壽根), 송훈익(宋勳翼), 송문근(宋文根), 이태희(李兌熙)·이봉희(李鳳熙) 형제 등과 함께 이기정도 이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수천 명의 군중이 참여한 만세 시위에 당황한 일제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와 성명 미상자 2명 등 3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이봉희 등 일곱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 군중이 해산하자 일제 경찰이 주동 인물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장석영·송문근·송준필·이봉희·성대식(成大湜)·송우선·송회근·송훈익 등과 함께 이기정도 붙잡혀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자 불복하여 항소했고,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또한 이기정은 1926년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창숙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경상북도 영주 출신의 송영호(宋永祜)를 도와 비밀리에 군자금 모집에도 나섰다가,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창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 교포들을 모아 집단 거주지를 마련하고 산업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며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 전쟁을 목표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국내의 유림들이 동참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다가 600여 명이 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의거(儒林團義擧)였다. 이후 이기정은 향리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며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1955년 3월 15일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채양록(蔡陽錄)』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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