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01
한자 裵尙瑜
영어공식명칭 Bae Sangyu
이칭/별칭 공근(公瑾),만학당(晩學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배상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86년연표보기 - 배상유 사망
출생지 배상유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성산

[정의]

조선 후기 성주에 머물며 학문 탐구에 정진한 학자.

[가계]

본관은 성산[현 경상북도 성주군]. 자는 공근(公瑾), 호는 만학당(晩學堂). 증조할아버지는 공조참판 배흥립(裵興立)이고, 아버지는 현감 배명전(裵命全)이다.

[활동 사항]

배상유(裵尙瑜)[1610~1686]는 성주군 김산면[현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8세에 고종형 배유념(裵柳淰)에게 수업을 받았고, 이어 강백년(姜柏年)[1603~168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에 실패한 이후 학문의 길을 걸어 오로지 학문 탐구에 전념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 김상용, 신석번(申碩蕃),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1620~1674]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특히 유형원과는 서울에서 친밀하게 지냈는데, 유형원의 아들을 사위로 맞이할 정도였다. 배상유와 유형원은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 학문적 경향과 시국관이 대체로 일치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며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바깥일을 사절한 채 학문 탐구에 더욱 정진하였다. 학행과 도덕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책을 읽을 때면 침식(寢食)조차 잊었다.

1672년(현종 13) 재주와 덕망으로 천거되어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77년(숙종 3) 사직서(社稷署) 참봉을 제수 받고 잠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왔다. 1678년(숙종 4) 심학성리(心學性理)의 요체와 당론을 억제하고 현재(賢才)를 가려 쓰는 설을 개진한 상소를 올렸다. 또 유형원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보인 전제(田制)·병제(兵制)·학제(學制) 등의 7조를 시행하자는 건의를 하였고, 숙종(肅宗)의 가납을 받은 바 있다. 서울에서 고향 김산(金山)으로 돌아온 뒤 만력동(萬曆洞)에 집을 짓고 ‘만학당(晩學堂)’이라 편액을 단 뒤 『대학(大學)』·『근사록(近思錄)』의 취지와 요지 및 각 경전의 난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을 손수 베껴 가며,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의 설을 깊이 연구하였다. 만학당 벽에 ‘경계잠(警戒箴)’을 써 붙이고 스스로를 엄하게 하였다. 또한 숭명대의(崇明大義)를 존중하여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즐겨 외웠으며, 척화신(斥和臣)[병자호란 때 중국 청나라와 화친하는 것을 배척하던 신하] 김상헌(金尙憲)[1570~1652], 이목(李楘)[1572~1646]과 더불어 『춘추(春秋)』의 의리를 강론하였다.

배상유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간행과 보급을 위해 경신환국(庚申換局)[서인(西人) 일파가 반대파인 남인(南人)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사건] 전에는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에게 『반계수록』을 열람시켰다. 윤휴 사후에는 영남 남인의 영수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에게 제시하고 협력을 구하였다. 결국 이현일로 하여금 『반계수록』의 서문을 쓰게 하는 중개 역할을 하였다. 이는 근기 지역 남인과 영남 지역 남인 간의 교류와 제휴를 증명해 주는 사례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점에 배상유가 차지하는 학문적 위치가 있다.

[학문과 저술]

문집 4권과 사례비설 1권, 연보 1권 등을 남겼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칠서변의(七書辨義)』·『이기설(理氣說)』·『대학발휘(大學發揮)』·『근사록요서』 등을 저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던 삼강서원에 배향되었고, 김산 신하촌에 강기가 적은 신도비가 섰다. 또 정조(正祖)가 『존주록(尊周錄)』에 배상유의 이름을 올렸고, 1873년(고종 10) 강백년의 후손 강노(姜㳣)[1809~1887]가 고종(高宗)에게 상소를 올려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로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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