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00
한자 裵尙龍
영어공식명칭 Bae Sangryong
이칭/별칭 자장(子章),등암(藤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우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4년연표보기 - 배상룡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55년 8월 28일연표보기 - 배상룡 사망
출생지 배상룡 출생지 - 경상북도 칠곡군
묘소|단소 배상룡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성산

[정의]

조선 후기 성주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본관은 성산.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배덕문(裵德文)이고, 아버지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역임한 배설(裵楔)이다.

[활동 사항]

배상룡(裵尙龍)[1574~1655]은 성주 팔거현 도촌리[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 도야에 평생을 바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19세의 나이로 아버지 배설의 군문(軍門)에서 업무를 도왔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호소사에 임명된 스승 장현광의 부름을 받아 참모로서 초유문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仁祖)를 구하기 위해 북상하는 경상도 순찰사 심연의 종사관이 되어 순찰사를 보좌하였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라는 국가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태었던 것이다.

17세에 정구의 문하에 입문하고부터 47세에 정구가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난리 중에도 스승을 찾아뵈었고, 모함을 받은 스승을 위해 복궐(伏闕) 상소도 하였다. 스승의 저술을 도왔으며, 신병의 치유를 위해 온천으로 떠나는 스승을 배행하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배상룡의 향념(向念)은 스승이 죽고 난 뒤에 더욱 절절하고 부지런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48세에 동문들과 회연초당의 백매원(百梅園)에 모여 스승의 문집을 교정하고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이듬해인 1622년(광해군 14)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모신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스승의 위판(位版)을 배향하였고, 겨울에는 동문들과 함께 스승의 유허에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1560~1638]은 원장으로, 배상룡은 부원장으로 각각 추대되었다. 50세에는 동문들과 함께 스승의 언행록을 편찬하였다.

1624년(인조 2) 51세에는 관찰사를 통해 조정(朝廷)에 장계를 올려 스승 정구천곡서원(川谷書院)에 배향하였다. 천곡서원은 성주에 있던 서원인데 당시 정자(程子)[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형제를 높여 이르는 말]와 주자(朱子)[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를 높여 이르는 말] 및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향사하고 있던 서원이었다. 1625년(인조 3) 52세에 직접 가서 회연서원의 공사를 살폈고, 1626년(인조 4) 53세에 스승의 문집을 편집하고 거창에 가서 스승의 신도비 빗돌을 다듬었다. 54세 여름에 회연서원이 완공되자 가을에 스승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겨울에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교정하고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1561~1638]과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에게 각각 스승의 연보와 신도비명을 청탁하였다. 1628년(인조 6) 55세에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마쳤다. 1630년(인조 8) 57세에 스승의 연보를 교정하여 간행하고 거창에 가서 신도비를 운반해 왔다. 1633년(인조 11) 60세에 스승의 강학지인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증축하고 스승의 묘소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배상룡이 47세 때 맞이한 스승 정구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그 빈자리를 감당할 수 없던 배상룡은 장현광을 다시 스승으로 모셨다. 53세에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 가서 장현광을 뵈었다. 선사(先師)가 죽은 뒤 배상룡은 장현광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고 한결같이 선사를 섬기던 것처럼 섬겼다. 장현광이 세상을 떠난 후인 1639년(인조 17) 66세에 인동으로 가서 장현광의 위판을 오산서원(吳山書院)에 배향하였고, 69세인 1642년(인조 20) 성주 천곡서원에 모신 장현광의 위차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글을 지어 고유(告由)하였다. 1654년(효종 5) 81세에는 인동에 가서 장현광을 모실 서원의 창건을 의논하였으나 서원의 낙성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인 1655년(효종 6) 8월 28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배상룡이 죽고 불과 한 달 뒤에 부지암서원이 낙성되어 장현광의 위패가 주벽(主壁)으로 봉안되었다. 부지암서원은 1676년(숙종 2)에 동락서원으로 사액되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등암집(藤庵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도남재, 등암영각, 유허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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