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472
한자 古文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미진

[정의]

성주 지역에서 제작·발급하였거나 소장·보존하고 있는 고문서 일체.

[개설]

성주에서 제작 발급되었거나 현재 소장되고 있는 고문서는 대체로 회연서원(檜淵書院), 대산동 교리댁, 완석정(浣石亭) 종택, 응와 종택, 그리고 수륜면 의성 김씨(義城金氏) 문중의 김기대(金基大)에 의해 보존 소장되어 오고 있다.

회연서원에는 90여 건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 한강(寒岡) 정구(鄭逑) 및 그의 후손들과 관련한 교지(敎旨), 교첩(敎牒), 시권(試券), 유지(諭旨) 등에 해당한다. 대산동 교리댁에는 이석구(李碩九)의 녹패(祿牌), 관속안(官屬案), 대자법서(大字法書), 수진시첩(壽辰詩帖), 수연시첩(壽燕詩帖), 수연운(晬讌韻), 탁대(倬對), 고서신첩(古書新帖), 어제우암송선생묘갈비명탁본(御製尤庵宋先生墓碣碑銘拓本) 등이 소장되어 있다.

완석정 종택에는 주로 이언영(李彦英)의 교패(敎牌) 24점, 교지(敎旨) 등 대부분이 이언영과 관련된 문서들이며, 그 외 이두진(李斗鎭), 이해윤(李海潤), 이수풍(李遂豐) 관련 문서가 소량 있다. 청원서 성격의 소지류(所志類)는 산송(山訟)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며, 전령(傳令)과 해유문서(解由文書)는 이수풍(李遂豊)과 관련된 것이다. 또한 입안(立案), 호적류(戶籍類), 완의(完議) 등 증빙 문서들이 있고, 이해윤, 이시하(李時夏), 이현(李鉉), 이만근(李萬僅) 등의 준호구(準戶口) 및 호구 단자(戶口單子) 등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명문(明文)은 주로 토지 매매(士地賣買)와 관련된 것이 많고, 노비 매매 관련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통문(通文)은 이언영의 추배(追配)와 관련하여 향중 사람들과 주고받은 것과 산송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 외 간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응와 종택에는 고서류 306종 511책, 교지와 간찰을 포함한 고문서가 6,193점, 목판 및 현판 472점, 서화류 208점, 기타류 44점 등 모두 7,428점에 이른다. 이는 현재 대부분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주요 경전류로는 『상변통고(常變通攷)』·『삼반예식(三班禮式)』·『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일송(日誦)』 등이 있고, 사서류에는 『국조잡록(國朝雜錄)』·『융릉지(隆陵誌)』·『실록청제명기(實錄廳題名記)』·『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포천지(布川誌)』·『시헌서(時憲書)』·『동소만록(桐巢漫錄)』 등이 있으며, 그 외 『성경(性經)』·『응와일기(凝窩日記)』·『계약장정(契約章程)』·『중간노걸대(重刊老乞大)』·『화경(花經)』·『속유선지(續遊僊誌)』·『임영록(臨瀛錄)』·『기사회방운첩(己巳回榜韻帖)』 등이 있다. 고문서는 34종 6,193점이며 간찰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외에 목판 32종 472점이 소장되어 있으니 『응와집(凝窩集)』 목판 441점 외에도 ‘만산일폭루(萬山一瀑樓)’, ‘북비(北扉)’, ‘사미당(四美堂)’, ‘농서(農棲)’, ‘응와(凝窩)’, ‘서료(書寮)’ 등이 그것이다. 서화류 총 208점 가운데 ‘우부승지사증(右副承旨寫贈)’, 『무이도지(武夷圖誌)』, 『포천도지(布川圖誌)』, 시아첩(視兒帖)[아버지가 아들에게 옛 성현들의 잠명과 가훈 등을 직접 써서 주는 책, 집안에 교훈이 될 수 있는 좋은 글을 모아 직접 써서 준 3책], 집고첩(集古帖)[옛 서체를 모아 놓은 첩자] 등이 유명하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기대(金基大) 문중에는 총 868점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교지(敎旨) 1건, 녹패(祿牌) 2건, 첩정(牒呈) 6건, 완문(完文) 4건, 호구 단자(戶口單子) 32건, 준호구(準戶口) 8건, 소지(所志) 93건, 명문(明文) 10건, 통문(通文) 36건, 회문(回文) 6건, 혼서(婚書) 22건, 그 외 상례문, 애사(哀詞), 제문 등이 있으며 절반 이상은 간찰이 차지한다.

이 외에도 성주 지역에서 제작 발급된 주요 고문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계회입의(契會立義)」정구가 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1583년에 회연에 백매원(百梅園)을 조성한 뒤 성주 회연(檜淵)에서 계를 조직하여 그 운영에 대한 세칙과 절차를 만들었는데, 그 중 세칙에 대한 것이 「계회입의」이다. 그리고 「사촌동계서(沙村洞契序)」정구가 1619년에 성주 사촌(沙村) 지역민을 위해 동계(洞契)를 결성하였는데, 이 동계가 만들어진 이유와 참여 인원, 임원들의 명칭 등의 연유를 밝히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당시 성주 지역은 임진왜란 이후 극심한 피해로 농경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바 이 동계의 조직을 통해 하층민들을 단속하고 위축된 재지사족들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성주동계서문(星州洞稧序文)」은 이주(李𦁖)[1599~1669]가 17세기 성주 일대에서 시행된 동계에 대해 작성한 서문으로, 임진왜란 직후 와해된 향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양반과 평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상하 합계의 형식을 취하게 된 배경을 기술한 것이다. 「성주향교 통문(星州鄕校通文)」은 1875년 4월 10일 성주향교에서 성주 고을의 각 문중에 보낸 통문[통지문]을 말하며, 1875년 3월 10일에 성산 이씨 문중이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2]의 강학 장소인 만귀정(晩龜亭) 중수를 위해 회연서당에서 계를 조직하여 관련 인사 총 59명이 연명(聯名)을 한 뒤 성주향교에 통문을 보냈는데, 한 달 뒤인 4월 10일에 성주향교에서 만귀정 중수 사업에 협조하고자 성주 각 문중에 관련 회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작성한 두 통의 통문이 바로 이것이다.

「성주향안(星州鄕案)」은 1603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성주목(星州牧)에서 작성된 향안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향안을 복구하기 위해 성주향교에서 약 208년 동안 63차례 걸쳐 작성된 것이고, 『성주의국중수기(星州醫局重修記)』는 1693년 송익(宋熤)[1631~1701]이 성주에 있던 의국(醫局)을 중수하게 된 배경과 그 전말을 기록한 고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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