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76
한자 明村施文用遺墟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1길 198-6[문명리 125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47년 5월연표보기 - 명촌 시문용 유허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72년 - 시문용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43년 - 시문용 사망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1길 198-6[문명리 1258]지도보기
원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1길 198-6[문명리 1258]
성격 유허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시문용|홍직필|이해종|이원효
크기(높이, 너비, 두께) 높이[174㎝]|너비[78㎝]|두께[28㎝]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 성주에 정착한 시문용을 기리기 위하여 1847년에 세운 비.

[개설]

시문용(施文用)[1572~1643]은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자가 종록(宗祿), 호가 풍천(風泉)이다. 우리나라 절강 시씨(浙江施氏)의 시조이다. 정유재란 때 조선에 들어왔다가 귀화하여 성주 지역에 정착했다. 아버지 시윤제(施允濟)의 명으로 정유재란 때 제독 마귀(麻貴)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 번 공훈을 세웠다. 명나라 군대가 귀국할 때 시문용은 병이 들어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성주 지역 남쪽 법산방(法山坊)에 정착했다. 법산방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보월리·작은리·성리 지역이다. 시문용의 사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대명 마을에 거주했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낼 때 대보단(大報壇)[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하는 재단]의 의전에 따라 세 황제[명나라의 태조·신종·의종]의 기일에 단에 올라 절했다.

[건립 경위]

1832년(순조 32) 시문용의 7세손 시치박(施致博)이 종친들과 함께 대명단(大明壇)을 중수했다. 1834년 유허에 풍천재(風泉齋)를 지으면서 비를 함께 세우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시치박의 아들 시정석(施珽錫)이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에게 비문을 청하여 1847년 5월에 명촌 시문용 유허비(明村施文用遺墟碑)를 건립했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리 대명 마을 내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풍천재의 입구에 있다.

[형태]

좌대(座臺), 비신(碑身), 비개석(碑蓋石)으로 된 입비의 형태이다. 좌대는 귀부(龜趺), 비개석은 이수(螭首)이다. 높이는 174㎝, 너비는 78㎝, 두께는 28㎝이다.

[금석문]

비신에는 사면에 글이 새겨져 있다. 비신 앞면 상부의 전서(篆書)는 ‘황명 도사 동원중군 절강 시공 유허비(皇明都司東援中軍浙江施公遺墟碑)’이다. 비문은 홍직필이 짓고, 이원효(李源孝)가 글씨를 썼으며, 이해종(李海宗)이 전서했다.

[현황]

명촌 시문용 유허비는 서학(徐鶴)의 유허비와 나란히 서 있다. 두 유허비 뒤에 풍천재가 있으며, 풍천재 뒤편 산길을 올라가면 대명단이 나온다.

[의의와 평가]

조선으로 귀화하여 성주 지역에 정착한 명나라 장수 시문용의 행적 및 그의 후손들이 성주 지역에 세거하게 된 내력을 기록했다는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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