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 언론 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24
한자 排日言論鬪爭
영어공식명칭 Domestic and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Struggle to Reject Japanese Imperialism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배일 언론 투쟁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9년 12월연표보기 - 배일 언론 투쟁 종결
전개 시기/일시 1905년 12월 - 성주 유림의 복합 상소 및 일본군 사령부 투서
전개 시기/일시 1907년 - 이승희 헤이그 평화 회의에 통고문을 보냄
발생|시작 장소 배일 언론 투쟁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배일 언론 투쟁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승희|김창숙|곽종석|장석영|이두훈|한주학파

[정의]

개항기 성주 지역 한주학파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한 국권 회복 운동.

[개설]

배일 언론 투쟁은 성주의 한주학파 유생들이 무력 항쟁을 통한 국권 회복보다는 만국 공법에 호소하는 외교를 통한 국권 회복이 더 적실하다는 입장에서 전개한 구국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1895년 을미의병 때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계승한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의 한주학파 유생들은 무력 투쟁보다는 만국 공법에 의거한 외교 독립론을 앞세우는 배일 언론 투쟁을 모색하였다. 이후 성주 유림들의 배일 언론 투쟁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꾸준히 이어졌다.

[경과]

을미의병기 의병 전쟁을 포기한 이승희·곽종석 등 한주학파 유생들은 연명으로 일본의 야만적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통고문을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였다. 1896년 2월 7일 이승희는 곽종석·장완상(張完相)·이두훈(李斗勳)·윤주하(尹冑夏)·강구상(姜龜相) 등과 함께 연명으로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통고문 「통고천하각국공관문(通告天下各國公館文)」을 러시아·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였다. 외국 공사관에 일본의 무도를 알리며 만국 공법에 의거하여 한국을 지원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통고문이었다.

1905년 8월 이승희는 국권 상실의 위기적 상황에서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05년 12월 한주학파 유생들과 함께 올린 복합 상소에서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무효임을 밝혔고, 일본군 사령부에도 투서하여 조약 파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이승희를 비롯한 장석영·이두훈 등 성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의 고령·달성·현풍·김천·선산·칠곡 등지에서 한주학파의 유생 300여 명이 이 상소에 참여하였다.

1907년 이승희는 제2회 헤이그 평화 회의에 편지를 보내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하여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고 침해당한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보낸 편지는 「여화란국해아만국평화회중서(與和蘭國海牙萬國平和會中書)」와 「이해아변무사통고만국정부문(以海牙辨誣事通吿萬國政府文)」 그리고 「여영국류학생서(與英國留學生書)」 등 3건이었다. 또 김창숙(金昌淑)을 비롯한 성주 유림은 1909년 12월 일진회의 합방론에 반대하는 「일진회성토건의서(一進會聲討建議書)」를 중추원에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김창숙은 을사오적의 처단과 일진회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결과]

한계(韓溪) 이승희, 심산(心山) 김창숙 등의 성주 유생들은 만국 공법에 의거한 외교 독립론에 큰 기대를 걸고 정부와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각국 공사관이나 일제 침략 기관 등에 통고문을 보내고, 제2회 헤이그 평화 회의에 편지도 보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성주 지역 유생들의 배일 언론 투쟁은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통고문을 보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고발한 이승희의 투쟁, 1919년 유림단의 파리 장서 운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한 김창숙의 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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