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274
한자 靑銅器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김세기

[정의]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 고인돌과 선돌을 세우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시대의 사회와 문화.

[개설]

청동기 시대는 고인돌과 무문 토기(無文土器)로 대표된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토착 사회에 금속기인 청동 검과 청동 거울 등 선진 문물을 사용하는 이주민 집단에 의해 형성되는 시대로, 대개 기원전 15세기쯤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주 지역에서는 아직 청동기가 출토된 유적은 없고 고인돌과 선돌[입석(立石)]이 중심 유적이다.

[내용]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청동 검이나 청동 거울 등 청동기나 무늬 없는 토기[무문 토기], 붉은 토기[홍도(紅陶)] 등이 출토되는 주거지[움집]나 고인돌,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 등의 무덤이 일반적이다. 성주 지역에서는 지표 조사 등 학술 조사에 의해 고인돌 165기와 선돌 6기 등이 확인되었다. 한국의 고인돌은 지상에 판석의 매장부를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큰 돌을 올려놓아 탁자처럼 만든 북방식 고인돌과 지하에 석관이나 석곽을 만들고 그 위에 조그만 받침돌을 놓고 큰 상석을 올려놓은 바둑판 모양의 남방식 고인돌 두 형식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성주의 고인돌은 모두 남방식이다.

남방식은 상석(上石)[뚜껑돌]을 고인 지석(支石)[고임돌]이 확실한 기반식(基盤式)[바둑판식]과 고임돌 없이 그대로 상석을 얹어 놓은 개석식(蓋石式)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성주 지역에 분포한 고인돌은 기반식과 개석식이 섞여 있다. 그런데 기반식은 받침돌이 빠지거나 주변에 흙이 덮이면 개석식처럼 보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를 하기 전에는 엄밀히 구별하기가 어렵다. 선남면 명포리 고인돌의 경우 큰 뚜껑돌 밑에 작은 고임돌 몇 개를 둘러놓은 위석식(圍石式)이었는데, 이것도 개석식이다.

또한 선돌 유적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과 관련되어 경계 표시라고 하기도 하고 막연히 거석 기념물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최근 대구광역시의 진천동 입석을 발굴한 결과 입석 주위에 장변 20m, 단변 10m의 넓은 장방형 석축을 쌓은 시설이 나타나고, 그 시설 주변에서 무문 토기가 출토되어 선돌이 고인돌 사회와 관련 있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한 그 시설은 단순한 경계 표시가 아니라 부락 공동의 제의(祭儀)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는 금속기의 사용과 농업 경제의 진전에 따라 사회 분화가 이루어지고, 정복 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 사회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정하고 영속적인 계급성과 집단성을 띤 세력이 형성되며, 그들에 의해 그 사회를 통괄하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조직체인 초기 국가가 성립되는 시기로 파악되고 있다. 성주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들로 미루어 청동기 시대 성주는 하천 변의 분지와 유역에 따라 이천 상류권, 이천 하류권, 백천 상류권, 백천 중류권, 백천 하류권[낙동강 연안] 및 대가천 상류권의 6개 생활권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