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063
한자 星山里
영어공식명칭 Seongsa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재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성산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79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성산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동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9.63㎢
가구수 1,523가구
인구[남/여] 2,745명[남 1,414명/여 1,331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성산리에는 성주 읍기(邑基)의 안산(案山)인 성산(星山)[383.4m]이 있는데, 이 성산을 앞산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성산(星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성산1리의 자연 마을인 차동골[차동(車洞)]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전승지로서 수레가 집결한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성산2리 수비실(守備室)[소비골·우비곡(牛碑谷)·시비실]은 임진왜란 때 왜병을 무찌르고 성주성(星州城)을 지킨 곳이라 하여 ‘수비실’로 하였다가 음이 변하여 ‘시비실’로 되었다는 설과, 옛날 이 마을의 나무꾼이 소를 몰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범을 만났는데 소가 범에게 대항하여 나무꾼을 구하고는 범과 함께 죽어서 마을 사람들이 소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소를 묻고 비(碑)를 세운 다음 우비곡이라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산3리 자연 마을인 산막터[山幕]는 살망태로도 불리는데, 성산에 봉수대가 설치되고 그 봉수대를 관리하는 봉군(烽軍)들이 거주하던 산막이 이곳에 있어 ‘산막터, 살망태’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산 4리 승왜리(勝倭里)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 군사를 매복하여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군사 2,600여 명을 섬멸한 승전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성산5리의 새뜸[새터·신기(新基)]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이고, 성산6리 장자골[장자곡(長者谷)]과 잔잣골[성곡(城谷)]은 고려 시대 큰 부자가 성산 아래 살았다 하여 유래한 명칭이라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성산리는 고대 성산가야[벽진가야] 시대 고분군이 산재한 것으로 미루어 성산가야의 본거지로 추정된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성주읍 지역은 용산면(龍山面), 남산면(南山面), 본아면(本牙面), 북산면(北山面)의 4개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성산리 지역은 용산면과 남산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차동골, 막골, 시비실, 살망태, 싱어리, 두두목골, 장자골, 함바우, 개모산, 새뜸 마을을 합하여 성산동으로 하고 4개 면[용산면, 남산면, 본아면, 북산면]을 합한 성주면의 10개 법정동 중 하나로 편제하였다. 1979년 성주면성주읍으로 승격하면서 성주읍 성산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각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성주읍 성산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와우형(臥牛形)의 성주 읍기는 읍의 북쪽에 자리한 금산리의 인현산(印懸山)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성산을 안산으로 한다. 성산칠봉산-대황산-대성산에서 이어진 산줄기로 성산리의 남산 내지 앞산이 된다. 북쪽에는 벽진면에서 성주읍 시가지 경계를 거쳐 한개 마을 앞에서 백천과 합류하는 이천(伊川)이 흐르는데, 성산에서 발원한 성산천, 차동골천과 합류하는 중간 지역에는 경지 정리가 잘된 넓은 들판이 있다. 성산이 있는 남쪽은 높고, 성주읍 시가지와 이천 주변의 넓은 들이 펼쳐진 북쪽은 낮은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을 이룬다. 선남 고개[집우현(執牛峴)], 별티 고개[성현(星峴)], 굴티 고개[굴현(屈峴)]가 있다.

[현황]

성산리성주읍의 동남부에 자리하여 동부와 남부는 성주군 선남면성원리장학리, 성주군 용암면 중거리, 서부와 북부는 성주읍대황리경산리, 예산리, 삼산리와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9.63㎢이며, 성산1리와 성산2리, 성산3리, 성산4리, 성산5리, 성산6리 6개 행정리에 1,523가구, 2,745명[남 1,414명, 여 1,33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국도 제30호선국도 제33호선, 중부 내륙 고속 도로가 통과한다. 지형적으로 이천을 경계로 시가지 권역과 농업 권역으로 나뉜다. 시가지에 있는 성산5리 새뜸마을은 주거지와 상업 지역이 주를 이루며, 성산1리와 성산2리, 성산3리, 성산4리와 성산6리 등 5개 행정리 주민들은 성산 아래 구릉지와 이천 주변 농경지 주변에 마을을 이루면서 주로 참외를 재배하고 있다. 성주군에서 추진 중인 도시 재생 뉴딜 1차, 2차 사업이 경산리성산리 일원을 대상지로 하고 있어 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원도심의 기능 회복이 기대된다.

성산5리에는 성주군의 행정 및 금융 기관, 문화 복지 및 체육 시설이 상당수 있다. 행정 기관으로는 성주읍 행정복지센터, 성주경찰서, 성주군 선거관리위원회,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성주군법원·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성주등기소 등이 있고 금융 기관으로 대구은행 성주지점과 성주군 산림조합 등이 있다. 문화 복지 시설로는 성주군 종합 사회 복지관, 성주군 청소년 문화의 집, 성주 국민 체육 센터, 성주군 별고을 교육원이 있다. 성산6리 함바우에 2003년 개관한 성주 문화 예술 회관이 있고, 성산4리 승왜리에 2021년 5월 개관한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이 있어 지역 주민의 문화 갈증 해소와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성산2리에는 성주 농공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문화 유적으로 성산가야 유적으로 알려진 성주 성산동 고분군(星州星山洞古墳群)이 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성주 성산동 고분군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성산의 북쪽과 주변 경사면 일대에 분포된 성주 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쯤 조성된 것으로 현재 번호를 부여하고 관리하는 고분의 수는 321기이지만, 멸실되었거나 훼손된 고분까지 합하면 그보다 많은 수백 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성산의 정상에는 퇴뫼식 산성인 성산산성과 개항기까지 운용되던 봉수대가 있어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1966년부터 이곳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도로와 군사 시설을 설치하여 문화유산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서 1966년 12월 30일 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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