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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85
한자 徐丙俊
영어공식명칭 Seo Byeongj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8월 27일연표보기 - 서병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서병준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서병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81년 2월 23일연표보기 - 서병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서병준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서병준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80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서병준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80
활동지 서병준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서병준(徐丙俊)[1900~1981]은 1900년 8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480번지에서 태어났고,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이현기(李玄琪)성주군 가천면 동원리이상해(李相海)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합세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어물상을 하고 있던 서병준(徐丙俊)성주읍 경산리의 배상윤(裵相潤), 대가면 흥산리백성흠(白聖欽)칠봉리의 김원술(金元述) 및 매수리박경하(朴京夏), 용암면 동락리노기학(魯基學), 초전면 자양리 출신의 김구진(金龜鎭) 등과 함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오후 1시에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도 송우선(宋祐善)·송회근(宋晦根)의 주도하에 송수근(宋壽根)·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李鳳熙) 등이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일제 경찰이 시위 군중을 막으며 주도 인물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3,000여 명의 시위대가 분노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서 및 군청 앞의 양쪽 도로와 우편국 앞에서 시장에 이르는 도로에서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 외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이 발포할 때 물러나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오후 10시경에 해산하였다.

서병준은 배상윤·백성흠·노기학·김원술·박경하·김구진 등과 함께 체포된 후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배상윤·백성흠·노기학·김원술·김구진 등과 함께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1년 2월 2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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