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84
한자 白聖欽
영어공식명칭 Baek Seongheum
이칭/별칭 천약(天若),우초(友蕉)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10월 17일연표보기 - 백성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백성흠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백성흠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22년 7월 29일연표보기 - 백성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백성흠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6년 9월 21일 - 백성흠 추모 우초 백성흠 선생 공적비 건립
출생지 백성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4길 30[흥산리 242]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백성흠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4길 30[흥산리 242]
활동지 백성흠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천약(天若), 호는 우초(友蕉). 아버지는 백민기(白玟基)이다.

[활동 사항]

백성흠(白聖欽)[1888~1922]은 1888년 10월 17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리 242번지 탕곡(湯谷)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청백(淸白)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한학을 닦아 향리에서 학자로 이름을 얻었다. 1913년 가난으로 공부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탕곡서숙(湯谷書塾)을 설립하고, 사재를 출연하여 교육 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지역 사회 개발에도 노력하였다.

백성흠은 1919년에는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성주 지역 유림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자, 성주읍 경산리의 배상윤(裵相潤)과 어물상 서병준(徐丙俊), 용암면 동락리노기학(魯基學), 대가면 칠봉리의 김원술(金元述)과 매수리박경하(朴京夏), 초전면 자양리김구진(金龜鎭) 등과 함께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오후 1시에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였던 유림 측도 송우선(宋祐善)·송회근(宋晦根)의 주도하에 송수근(宋壽根)·송훈익(宋勳翼)·송문근(宋文根)·송규선(宋圭善)·이봉희(李鳳熙) 등이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일제 경찰이 주도 인물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자, 분노한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 외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이 발포할 때 물러나 서북쪽 산 위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오후 10시경에 해산하였다.

백성흠은 배상윤·서병준·노기학·김원술·박경하·김구진 등과 함께 체포된 후에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배상윤·서병준·노기학·김원술·박경하·김구진 등과 함께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과 옥고(獄苦)의 여독으로 1922년 7월 29일 사망하였다. 향년 34세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2006년 9월 21일 우초백성흠선생공적비건립추진위원회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흥산리에 우초 백성흠 선생 공적비(友蕉白聖欽先生功績碑)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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