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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432
한자 星州玉川書院
영어공식명칭 Okcheonseowon
이칭/별칭 옥천서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대봉리 77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92년연표보기 - 충렬사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옥천서원 훼철[서원 철폐령]
개축|증축 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 옥천서원 중건[이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09년 7월 6일연표보기 - 성주 옥천서원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96년연표보기 - 충렬사 옥천서원 사액
현 소재지 성주 옥천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대봉리 777]지도보기
원소재지 충렬사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 지도보기
성격 서원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성주 옥천서원(星州玉川書院)은 조선 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사룡은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이정건(李廷建)의 아들었으며 비호석(非乎石) 작촌의 양민이었다. 1641년(인조 19) 금주(錦州)에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청나라에서 조선에 화포(火砲)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조선은 병사를 징집하여 보냈는데, 이사룡 역시 징집되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발포하여 명나라 병사를 명중하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이사룡은 명나라한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며 탄환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공포(空砲)만 쏘았다. 이사룡의 행동은 청나라 병사에게 발각되었고, 이로 인해 이사룡은 사형을 당하였다. 청나라 병사가 이사룡에게 공포를 쏜 이유를 묻자, 이사룡은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기 때문에 실탄을 쏠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이사룡을 위해 염습하고 관을 만들었으며, 연로한 수령들에게 당부하여 작촌으로 운구하게 하였다. 이후 이사룡은 성주 지역에서 의인으로 불렸다. 1668년(현종 9)에 송시열(宋時烈)이 장계(狀啓)를 올려 이사룡의 아들 이선(李善)에게 관직을 내렸으며, 1793년(정조 17)에 국가에서 제문을 지어 이사룡성주목사로 추증하였다.

[위치]

성주 옥천서원은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대봉리 777번지]에 있다. 태종 태실(太宗胎室) 근처에 있으며, 성주군청에서 남쪽으로 약 13.7㎞ 거리에 있다. 지방도 제905호선을 타고 신천을 따라 내려가면 대봉교와 진일 농장이 나오는 삼거리가 보인다. 삼거리에서 대봉교 쪽으로 좌회전 후 신천을 따라 직진하다가, 반송들 이쌍수 농장 쪽으로 우회전하여 약 200m 직진하면 성주 옥천서원에 도착한다.

[변천]

성주 옥천서원은 1692년(숙종 18)에 성주목사와 성주 지역의 향인들이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 이름은 충렬사였으며, 이사룡이 살았던 마을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자리하였다. 충렬사는 1796년(정조 20)에 옥천서원으로 사액되었고, 이후 옥천충렬사 혹은 옥천서원으로 불렸다. 1872년(고종 9)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직계 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재 위치에 중건하였다.

[형태]

산록 경사지에 있는 관계로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였다.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와 동재·서재가 자리하고, 가장 높은 뒤쪽에 사당인 충렬사가 위치하는 전학 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가묘 일곽이 자리하고 있다.

[현황]

성주 옥천서원은 2009년 7월 6일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성주 옥천서원은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드러냈던 이사룡의 행적이 깃든 공간이다. 특히 성주 옥천서원은 당시 성주 군민들이 이사룡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는 점에서, 이사룡에 대한 성주 사람들의 인식과 더불어 성주 사람들의 숭명 배청 사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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