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58
한자 李士龍
영어공식명칭 I Saryong
이칭/별칭 사중(士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진갑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 이사룡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0년 - 이사룡 명청 금주위 전투에 참전
몰년 시기/일시 1641년연표보기 - 이사룡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2년 - 이사룡 추모 충렬사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93년 - 이사룡 성주목사에 증직
추모 시기/일시 1919년 - 이사룡 제향 성주 옥천서원 중건
거주|이주지 이사룡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이사룡 활동지 - 중국 금주위 송산포
묘소 이사룡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지도보기
성격 의사(義士)
성별
본관 성산
대표 경력 성주목사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의사(義士).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죽인 공으로 수문장(守門將)이 된 이유문(李有文)이다.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호종(扈從)한 공으로 무과에 오른 이정건(李廷建)이고, 어머니는 류씨(劉氏)이다. 아들은 현종(顯宗)이 1662년(현종 3)에 칠포 만호(漆浦萬戶)의 벼슬을 내린 이선(李善)이다.

[활동 사항]

이사룡(李士龍)[1613~1641]은 성주군 작촌(鵲村)[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서 살았고, 어릴 적부터 효도와 근신으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졌다. 1640년(인조 18) 청나라가 조선에 요청한 금주위(錦州衛) 싸움의 지원병을 파견할 때 포수로 참전하였다. 파견 때 성주목사가 전송연을 마련했으나 오랑캐를 도와 천자의 나라를 친다는 것이 의리에 맞지 않다면서 응하지 않았다.

송산포(松山浦)에서 명군과 교전할 때 총알을 넣지 않고 쏘다가 청군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했고,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덕을 배반할 수 없다고 맞서다가 처형당하였다. 형장에 끌려갈 때 온 군대가 다 같이 “의사(義士)! 의사!”라고 외쳤다고 한다. 청군이 절의를 높이 사 시신을 거두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있던 관소(館所)에 보냈고, 이후 시신은 국내로 송환되었다. 국경 안으로 운구가 시작되자 조정에서 각도의 관찰사에게 특명을 내려 호송하도록 하였다. 인조는 제문을 지어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극진히 장례하도록 하고, 성주목사 최유연(崔有淵)에게 묘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성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하였다. 1692년(숙종 18) 향리 사람들이 그의 옛터인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띠에 사당을 지어 옥천(玉川)이라 했고, 1793년(정조 17) 성주목사에 증직되어 정려를 짓고 1796년에 충렬사(忠烈祠)라 사액(賜額)하였다. 이후 후손 이성근(李成根)이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봉산 마을에 충의재(忠義齋)를 세워 향사했는데, 이는 월항면 인촌(仁村) 마을에 있던 사묘(祠廟)와 성주 옥천서원(玉泉書院)[경상북도 기념물]을 옮겨 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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