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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090
한자 上彦里
영어공식명칭 Sangeo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상언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용두면 상언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4년 2월 1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용두면 상언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상언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상언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상언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2.83㎢
가구수 213가구
인구[남/여] 368명[남 184명/여 184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용암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서쪽으로 약 1.5㎞ 거리에 자리한 안언(安堰) 또는 안상언(安上彦)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상언(上彦)’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안언은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쉬어 가면서 글 풀이를 하였다 하여 ‘책상 안(案)’ 자와 ‘선비 언(彦)’ 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통일 신라 이후 조선 시대까지 두의곡방(豆衣谷坊)에 속하였다. 1845년(헌종 11) 성주목사 김횡(金鑅)[1784~1847]이 두의곡방을 두릉방(杜陵坊)으로 바꾸었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군 명칭인 성주군(星州郡)으로 확정하고 방(坊)을 면(面)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두릉면의 상언동과 동촌동, 대동면(大同面) 기성동의 일부를 합하여 상언동으로 하고 두릉면과 대동면을 합한 용두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34년 2월 1일 용두면과 성암면을 합면하고 용암면으로 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용암면 상언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상언리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로 발달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남쪽은 약 3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들로 이루어졌고 북쪽은 남쪽으로 열린 마을을 약 150m 높이의 산지가 둘러싸고 있다. 중심부에는 낙동강의 지류 하천인 신천(新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범람하여 넓은 충적 평야가 발달하였다.

[현황]

상언리용암면의 중앙에 자리하여 동서남북이 용암면기산리사곡리, 용정리, 본리리, 운산리와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2.83㎢이며, 상언1리와 상언2리 2개 행정리에 213가구, 368명[남 184명, 여 18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상언리 서쪽 중앙 부분을 북서-남동 방향으로 중부 내륙 고속 도로가 지나간다. 구룡골[九龍谷]과 그 서쪽 마을인 갓골[산동(山洞)], 안상언[안언]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면 소재지인 동쪽에는 오일장인 용암 시장[3·8일 장]이 있다. 용암면 행정복지센터용암초등학교가 있다.

상언1리의 자연 마을인 구룡골은 용암초등학교가 있는 남향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서쪽 갓골과 함께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마을에는 자연신에게 안전과 소망을 빌던 당제단 터가 있다. 또한 새마을 운동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개화된 마을로 참외 재배와 한우 사육 등으로 복지 농촌 실현이 앞당겨진 소득 높은 마을이다. 구룡골 서쪽 갓골 뒷산에 풀무 가마터가 있는데 삼한 부족 사회 때부터 병기와 생활 용구를 생산 정비하던 곳이다. 뒷산 고분은 옛날 부족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안상언은 용암면 행정복지센터 서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상언리용정리와 함께 용암면의 소재지 마을이다. 2개의 리가 용암면 행정복지센터를 중심으로 양분, 공치(共置)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2002년 6월 설립한 2만 8183㎡ 규모의 상언 공단이 있어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안언은 영남 지역의 중요한 역(驛)으로서 경상남도 통영(統營)에서 서울을 잇는 주요 간선 도로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안언의 옛 이름 신안(新案)의 관계 지명이다. 문화 유적으로 조선 고종(高宗)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토포사와 통영우후를 역임한 국은(菊隱) 신보희(申輔熙)[1853~1909]를 추모하는 재사인 모인재(慕仁齋)와 조선 후기 삼례도찰방에 제수된 김두연(金斗鍊)[1855~1900]을 추모하는 재사인 만송재(晩松齋)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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