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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아주머니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3038
한자 정영희 아주머니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마을
집필자 강정만

출생과 청년기

"난리(한국전쟁)가 난 해의 이듬해(1951년)에 태어났으니 올해(2006년) 만으로 55세예요.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 손녀가 있으니 할머니 소리 들은 지도 오래 되었네. 내가 태어날 당시의 상황을 어찌 알겠냐만, 어린 시절에 참으로 배고프고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 시절엔 왜 그리도 못 살았던지! 밥을 굶어 얼굴이 노랗게 뜬 사람이 부지기수였어요. 부모로부터 무슨 태몽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당시만 해도 딸아이 낳으면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일이 못 되었거든. "

"나는 동래(東萊) 정씨(鄭氏)야. 조상 대대로 백일리에 살았는데 언제, 조상이 어디서 이곳으로 이주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도 이곳에 태어나 성장했어요. 결혼 전 처녀 때 산내면 밖에 나가 본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깥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어요. 산내면은 오지 중의 오지라 교통이 참 불편했지. "

"아버지(정정식)와 어머니(김희남) 사이에 나는 큰딸이고 서울에 사는 여동생(정영순)과 두 남동생(정영국, 막내)가 있는데, 지금 영국이는 부천에 살고 막내는 예전에 사고로 죽었어."

"산내초등학교를 다니다 그만 두었어요. 아버지(정정식)와 어머니(김희남) 슬하에 아들 둘, 딸 둘을 두었는데, 내가 맏딸이야.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내가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으므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거지. 공부가 하기 싫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당시는 맏딸은 부모님이 살림 밑천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공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어요. 더군다나 궁벽한 산골에서 하루 먹기도 바쁜 처지에 학교에 나갈 처지가 못 되었던 거지. 정 선생님이 생각나요. 지금은 어디에 사시는 지? 지금 대전에 사는 박점순, 서울에 사는 장혜자가 내 친구야. 사실 우리 마을에 내 또래는 몇 명 안 되었던 까닭에, 나는 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나 오빠들과 놀았어. 아이고! 내가 태어나던 해가 얼마나 비참했던 해야. 난리 통에 무슨 아이를 많이 낳았겠어? "

"처녀 때는 부모님이 한지(韓紙)를 만드는 일을 도왔어요. 나는 주로 한지를 말리는 일을 했지. 당시 우리 마을은 농사지을 땅이 워낙 협소했던 까닭에, 주민들이 농사일 이외에도 부업으로 목기와 한지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거든."

혼인과 시집살이

"남편은 셋째아들인데 시숙들이 전주, 수원에 살고 있어요. 잘하면 1년에 한 번이나 만날까? 사실 시댁 친척이나 친정 식구들 거의 못 만나고 지네요. 거리도 멀고, 각자 살기에 바쁘고 또 남편이 평생토록 저렇게 드러누워 있으니 누구를 만나겠어? "

"열여덟 살에 남편(전상철)을 만난 후 남편을 따라 이곳저곳에서 살다가 30년 전쯤에 이곳 백일리로 들어왔어요. 남편이 일을 하다가 중상을 입어 더 이상 일을 못할 처지가 되자, 내가 하는 수없이 남편과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온 거야. 처음에는 농사도 짓고 한지도 만들었는데 생활이 참으로 곤란했어요. 나중에는 김을생씨가 운영하는 금호공방에서 잡일을 했어요. 그 때 일당으로 1만2천원을 받았어. 내가 공방에서 일한 게 주로 나무를 깎고 본드를 사용해 재료를 붙이는 것이었으므로 공방 안은 언제나 먼지로 수북하고 독한 본드 냄새를 맡아야 했어. 몸이 많이 상해 그만두었어. 한 12년 가까이 일을 했을 거야. 남편은 지금도 몸이 아파 거동조차 불편해요. 남편 간호하랴, 자식들 키우랴, 참 힘들었어요. 나도 본드 냄새를 많이 맡아 몸이 상했어. 막상 공방 일을 그만 두고 나니 먹고 살 일이 막연한 거야. 그래서 실상사 입구에서 포장마차를 열었어요. 부침개 등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과 실상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팔았는데 장사가 제법 잘 되더라고. 남들이 그러는데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는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았어. 공방에서 일할 때보다 수입이 훨씬 좋았어. 아! 돈이란 이렇게 버는 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목돈이 생겼어. 물론 큰돈은 아니었지만 작은 식당하나 낼 정도의 돈이 생긴 거야. 그래서 6년 전부터 지금의 ‘백일리 식당(추어탕 전문)’을 열게 된 거지. 손님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추어탕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던지 가끔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요. 특히 마천 사람들이 일부러 많이 와서 팔아주지. 아픈 남편을 병수발 하고 사는 내가 안쓰럽다고. 수입이야, 이것저것 빼고 나면 그저 겨우 먹고 살만해요. 굳이 말하자면 한 달에 백오십만 원 정도나 될까? "

자녀양육과 출가

"남편(전상철)과 아들(전현식, 35세) 하나, 딸 셋을 키웠어. 큰딸(전현이), 둘째딸(전현주), 막내딸(전현정) 모두 출가하여 부천, 안산, 평택에서 살고 있어요. 다들 직장, 남편 따라 살고 있으니 함께 살 수 없는 노릇이야. 이런 산골에 어디 변변한 직장이 있어야지, 젊은 애들이 들어와 살겠어? "

통과의례

임신, 출산 시에 특별히 피한 음식이 있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고! 무슨 말이야? 내가 임신했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하루 세 끼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었는데, 무슨 가리는 음식이 있었겠어? 지금 젊은 여자들은 태아에 좋은 것만 골라먹는다는데, 예전에는 그런 것 없었어요. 정말로 예전에는 밥만 먹고 살아도 부자였어. 못 먹어서 얼굴이 검읏검읏한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당게. 나는 아무거나 잘 먹어요. 특별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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