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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구 아저씨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3032
한자 장종구 아저씨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마을
집필자 강정만

출생과 청년기

현재 마을 이장직을 맡고 있는 장종구 이장님은 올해 67세이므로 통념상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마을에서는 70세 이상이 되어야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또 중장년층에 속한 사람이 몇 명 안 되고 실제 마을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므로, 사실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1939년 10월 2일 생이므로 올해 만 67세이고 부모로부터 태몽 이야기는 특별히 들은 적이 없어요. 다만 내가 일본 나고야 태생이라는 점이 남들과 다른 점이겠지. 나중에 성장해서 보니 내가 태어났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더구먼. 참으로 험한 세상에 나왔던 거야. 우리 집안은 흥성 장씨(張氏)이며 조상 대대로 전라도 흥덕(興德)에서 살다가 7대조 할아버지께서 남원군 운봉(雲峰) 임리(林里)로 이주했다고 들었어. 그렇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또 무슨 이유로 운봉으로 이주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

"아버지 때 이곳 백일리로 들어왔어. 타계하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야. 전처는 함안 조씨(趙氏)이고, 지금 아내는 영광(靈光) 김씨(金氏)지. "

참고로 흥성(興城) 장씨는 시조가 장유(張儒)이며 전라도 고창군 흥덕에 뿌리를 내리고 각 지방에 퍼졌다. 흥성은 흥덕의 이칭(異稱)이므로 흥덕 장씨라고도 부른다. 시조 장유는 신라말에 난을 피하여 중국의 오월국(吳越國)으로 들어가 한학과 중국어를 수학하고 돌아왔다. 고려 광종 때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과 접대를 맡았다. 그 후 벼슬이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이르렀고, 그의 6세 손 장기(張機)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흥산군(興山君)[흥산은 흥성의 별호·別號다]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흥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읍군 소성면 중광리,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 영광군 법성면 월산리,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등이 주요 집성촌인데, 현재 흥성 장씨의 집성촌은 주로 전라도 일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2000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4만5천여 명의 흥성 장씨가 살고 있다고 한다.

"내 고향을 밝히라면 태어난 곳은 일본 나고야요, 성장한 곳은 이곳 백일리라고 할 수 있소. 어찌 태자리가 일본 땅이냐고? 혼란한 시대 나라 잃은 백성의 부평초 같은 인생 역정의 결과가 아니겠소? 왜정 때 선친(장환용)께서는 운봉에서 살았는데 젊어서 순사 시험에 합격하여 순창경찰서에 부임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일본인 순사와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야. 하루는 일본인 순사를 폭행한 일이 있었대요.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친께서 반일(反日) 정신이 좀 있었나 봐! 아니면 반골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 농촌에서 산천초목도 떨게 했던 일본인 순사를 폭행했으니, 선친께서 야반도주하지 않고서 어찌 살아날 방법이 있었겠어. 당시 조선 땅은 감옥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일본으로 밀항했던 거야. 일본에서 어머니(강오분)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았는데 경마장에서 말을 사육하는 일을 했다고 해. 내가 이런 연고로 일본에서 태어난 거야. "

"그 뒤 일제가 패망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거야. 당시 할아버지가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에서 거주하셨던 까닭에, 딱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를 찾아가 구례에 거주하며 잠시 남의 전답을 빌려 농사를 지었어. 하지만 부모님이 구례에서 5남매를 키우기가 너무 힘들었대. 그래서 할아버지의 권유로 이곳 백일리 장자터로 온 가족이 이주한 거야. 할아버지께서 실상사 스님들과 교분이 있으셨고 또 화전(火田)을 일구면 아쉬운 대로 내 땅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것 같아. 그 뒤 우리 가족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

"부모님은 7남매를 두었어. 내가 셋째야. 형과 남동생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누님은 윗동네, 막내여동생은 내동에, 나머지 두 여동생은 부산, 서울에 각기 살고 있어. 누님과 막내여동생은 같은 면에 살고 있으므로 가끔 만나지만, 나머지 동생들은 명절보다는 한식에 벌초할 때 만나는 정도야. "

"우리 가족이 백일리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께서 산내면사무소 산업계장으로 부임하셨어. 뜻밖에도 일본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이 면의 행정을 맡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거지. 나도 그 때 산내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철부지 시절을 보냈어. ‘6·25’ 사변이 1950년에 터졌던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사변이 났어. 휴전 이후에도 이곳은 빨치산의 습격이다, 공비 토벌이다 뭐다 해서 참으로 혼란스러웠고 어려웠잖아. 그 혼란의 와중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하지 못 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밖으로 나가 공부를 하지 못 한 게 참으로 한스러워. 모든 게 운명이려니 하고 살아. 임 선생님이 생각나는 데, 아이고! 나이 먹으니 선생님 이름조차 생각이 안 나는구먼. 그리고 곽종식, 배점대, 박귀태 등의 친구들이 기억이 나내. 지금 모두 서울 등 타지에서 살고 있어. 모두들 건강하고 잘 지내는 지 궁금해. 언제나 한 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런지 모르겠어. "

"서울 수복 이후에도 지리산 일대에서는 우익과 좌익의 대립과 투쟁이 극에 달했어. 아버지가 빨치산에게 끌려가셨는데 결국 산에서 나오지 못 하고 돌아가셨어. 그 때 아버지를 잃은 우리 가족의 슬픔을 어찌 필설로 다 설명하겠어. 지금까지도 가장 잊히지 않는 기억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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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구 아저씨

혼인

"아버지가 산중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래 어머니는 7남매를 데리고 사느라고 고생이 많았지. 불행 중 다행히 큰 형(장종호)이 아버지를 대신해 산내면사무소에 근무했어. 나는 고향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근근이 지내다가 21세 때 군대에 갔어. 전방에서 34개월을 근무한 후 제대했는데,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 하고 집안일을 도우며 세월을 보냈어. 29세 때 함안 조씨(趙氏)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어. "

하지만 첫 번째 부인과는 사별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 가족은 집사람(영광 김씨)과 큰딸(39세), 작은딸(37세), 아들(35세) 이렇게 나까지 포함해서 다섯이야. 자식들이 모두 제 짝을 만나 둥지를 틀고 제 자식들을 기르고 있으니,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까지 포함하면 내 씨도 꽤 퍼진 셈이지. 아! 참, 솔직히 말해서 현재의 집사람은 재취야. 아이들 엄마는 예전에 병으로 죽었어. 전처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어쨌든 지금의 집사람이 고마울 따름이지. 전처 소생의 자식들을 친자식 못지않게 애정으로 키웠으니 말이야. 큰딸은 용인에, 작은딸은 화성에, 아들은 충주에 살고 있어. 각자 남편 따라, 직장 따라 객지 생활하고 있는 게지 뭐. 나야! 운명이라 생각하고 백일리에서 한 평생 살지만, 자식들이야 뭐 그러겠어. 시골에 무슨 일자리가 있어야 말이지! 문뜩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보고 싶지만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제 먹기 살기에 바쁜 자식들을 오라, 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통과의례

"내 회갑 때는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했고, 손자 손녀들의 백일이나 돌잔치는 자식들이 알아서 했어. 다들 객지에 사니까, 내가 일일이 참석하기가 어려워. "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4.19 [출생과 청년기] 수정 그의 6세 손 기(機)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그의 6세 손 장기(張機)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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