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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생 할아버지의 직업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3011
한자 김을생 할아버지의 職業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집필자 강정만

직업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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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생 할아버지의 목기

김을생 할아버지는 1957년 간부 후보생이 되어 1년 동안 고된 훈련과 엄격한 교육을 마치고 난 뒤, 1958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1969년 대위로 예편할 때까지 12년 동안 전후방의 여러 지역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군문에서 장군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비육사 출신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하고 예편했다.

"막상 예편하고 보니까 육군 대위 출신을 특별히 반겨주는 곳이 없었어. 그래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와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지. 그런데 말이야,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는 데 소득이 영 시원치 않았어. 이런 첩첩산중에서 30마지기 농사면 영농 규모가 꽤 큰 편이라고. 하지만 1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했어. 부모님과 처 그리고 1남 3녀를 부양해야 하는 나의 어깨는 정말로 무거웠지. 그래서 무엇보다도 부업이 절실히 필요했어. 하루는 예전에 익혔던 목기 제작일이 떠오르는 거야. 물론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영수(永守)], 아버지[원달(元達)]에 이르기까지 목기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았어.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와 고도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목기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어. 시장에 양은 그릇이 넘치고 철제 제품이 나날이 쏟아져 나오니, 나무로 만든 제품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었던 거야. 이런 판국에 목기에 관심을 갖고 가업을 계승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 받기 일쑤였지. "

직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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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생 할아버지 가게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어. 먼저 남원 산내면에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에 의해 창건된 대가람 실상사가 있소. 주지하다시피 실상사는 신라 말엽 고려 초기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서 수많은 선승과 고승을 배출한 선종(禪宗)의 본산이지요. 한때는 수천 명의 스님들이 참선하고 공부하는 큰 절이었다고 하오. 스님들은 나무로 만든 발우를 식기로 사용하는데, 은행나무로 발우를 만들어 옻칠하는 기법은 원래 실상사 스님들의 비전(秘傳)이었지. 우리 마을 백일리는 실상사와 더불어 생겼던 까닭에 실상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소. 스님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를 깎아 발우를 만드는 방법과 옻칠 기법을 전해 주었던 거야. 마을 사람들은 자연히 지리산 일대에서 생산한 풍부하고 다양한 목재로 발우 등의 불교 용품, 제기(祭器) 등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지. 그러나 플라스틱 그릇이 한창 성했을 무렵 목기를 만들던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점차 마을을 떠났소. 돈벌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나는 발우를 만들어 스님에게 공양하는 일도 평생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아울러 지리산은 임산물의 보고(寶庫)이므로, 내 고향 산내면은 임산물과 관련이 있는 목기 산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목기 제작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거야. 내 나이 3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목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어. 목기는 정밀한 공예 기술도 중요하지만 옻칠이 그 생명력이오. 천연 옻칠은 그 침투력이 강해 색깔이 변하지 않으며, 좀이 슬지 않고 냄새가 없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하나의 목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오. 먼저 용도에 맞는 나무를 골라야 하는데, 발우는 은행나무, 제기는 물푸레나무나 오리나무, 물병과 밥통 찬합은 오리나무, 밥그릇은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야 하오. 나무를 자르고 초갈이, 재갈이는 기계로 하지만, 5푼 칼로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나, 사포질, 생옻칠 등은 반드시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오. 초갈이 한 뒤 6개월간 말리거나 찐 후에 재갈이를 하고, 그 연후에는 일일이 그 흠을 잡아내는 곡서의 과정을 통해 본살처럼 만든 다음 옻칠을 해야 하오. 칠을 하고 말리고 또 칠을 하고 말리는 과정이 7-8번 되풀이 된 연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목기가 완성되는 것이오. 어떤 것은 10번 이상 칠해야 하는 것도 있지요. 목기 한 개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8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지요."

특히 그의 전공(專攻)이라 할 수 있는 발우는 제일 큰 것이 밥을 담는 ‘어시발우’, 그 다음이 ‘국발우’, 설거지물을 받아두는 ‘천수발우’, 제일 작은 네 번째 발우가 ‘반찬발우’로 나뉘는데, 그는 여기에 하나를 보태 ‘5조발우’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 다섯 개를 포개면 딱 맞아야 하므로 발우 제작이 어렵단다. 또 발우는 기술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정성과 공력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가 이처럼 정성을 다해 혼이 깃든 목기를 만들었지만, 생산 초기에는 목기가 팔리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어렵사리 판로를 확보한 목기도 중간 도매상의 폭리에 시달렸다.

"그 때 나는 발우를 등에 지고 전국의 사찰과 암자를 돌며 스님들에게 직접 팔았어. 대개 사찰과 암자는 깊은 산중에 있는 지라,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길을 땀 흘리며 오르내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소. 또 길이 끊기고 어두워져 산속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일도 있었으니, 어찌 당시의 고난을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있겠소. 그때 싸 짊어지고 다녔던 보자기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소."

"내 인생의 좌우명이 ‘수연낙명(隨緣樂命)’이오. 어떤 고통이라도 자신의 인연으로 받아들여 즐겁게 살아야지요.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나는 즐겁게 받아들입니다. 이생에 태어나 대가없이 살다가 자기 인연이 다하면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오."

"백일리의 유명한 산업은 역시 목기야. 내가 경영하는 금호공예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다양한 목기를 생산하고 있어. 이곳 목기의 특징은 첫째, 원목의 목질이 견고하고, 둘째, 소리가 나지 않고, 셋째, 자연산 옻칠을 하므로 살균 살충의 효과가 있고, 넷째, 선조들의 예술 정신과 전통미를 엿볼 수 있소."

"그리고 목기 제작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첫 번째 단계는 ‘원목 절단’이오. 목기의 원자재인 물푸레나무, 박달, 노각, 괴목, 오리목 등 슬지 않도록 가을에 벌채하여 6-7개월 이상 건조한 다음 알맞은 크기로 절단하여 적당한 크기의 재목을 마련해야 하오. 두 번째 단계는 ‘초벌 깎기’요. 일단 절단한 재목을 용기의 형태를 짐작하여 끌칼로 깎은 다음 습도가 높지 않은 음지에서 약 150일 이상 건조해야 하오. 세 번째 단계는 ‘재벌 깎기’인데 초벌 깎기 후 잘 건조된 나무토막을 틀에 고정하고 발 또는 동력으로 돌리면서 적당한 부분에 끌을 갖다 대면 가리밥이 나오면서 허리가 날씬한 목기가 나오지. 이 때 목기의 거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 사포질 등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을 반복하여 완벽한 형태를 얻게 되는 거야. 네 번째 단계는 ‘칠하기’요. 옻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는 방법에 따라 생칠, 화칠 그리고 다양한 색상으로 정제 가공되는 옻칠은 재벌 깎기까지의 공정에서 완성된 백기(白器)를 오랫동안 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보존적 측면과 방습, 방수 및 광택을 위한 칠하기 과정으로 초벌칠과 6-10회의 재벌칠로 나뉘며, 살충력과 마모 방지에 강한 옻칠과 카슈칠 등 2종으로 구별되지. 특히 옻칠의 경우 적당한 온습의 조건이 수반되어야 하오. 마지막 단계는 ‘음건’이오. 옻칠 및 카슈칠이 목기에 적절하게 침투하여 은은한 광택을 얻기 위한 목기의 완성 단계로 약 10일간 음건 과정을 끝으로 고품질의 목기를 선별하여 제품으로 출하하는 것이오."

"우리 마을은 목기 이외에도 맛이 좋은 고사리, 육질이 단단한 표고버섯 등의 특산물이 있소. 산내면은 일교차가 크고 높은 산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각종 산채를 기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오. 하지만 평지가 적고 비탈이 많아 생산량은 많지 않은 편이오. 또 예전에는 전통 한지를 많이 생산했지만 지금은 명맥이 거의 끊긴 편이오."

김을생 할아버지가 부단히 발품을 팔고 돌아다닌 끝에 점차 스님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스님들의 구전을 통해 “발우는 지리산 김을생 것이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발우뿐만 아니라 각종 제기(祭器), 상(床), 목공예 등의 제작에도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대가의 반열에 올랐으니, 전국 규모의 민예품 경진대회에서 수차례 상을 받았고, 1983년에는 전국 민예품 경진대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특히 옻칠 부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마침내 옻칠장 부분에서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현재 김을생 할아버지는 고향 산내면 백일리에서 ‘금호공예’를 운영하고 있으며, 도제 30여 명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발우, 불기(佛器), 제기, 술병, 다반(茶盤), 찬합, 함지박 등 다양한 목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그는 또 공장 옆에 제심서원(濟心書院)을 열어 틈틈이 책도 읽고 글을 쓰며 마을 어린이들에게 한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공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토굴 하나를 마련하여, 매일 새벽 5시면 그곳에 올라 관음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단다.

이제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으니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단다. 세상의 풍파에 아랑곳 하지 않고 목기 공예 전승과 발전에 일가를 이룬 김을생 선생의 유훈은 이렇다.

"목기의 본고장에서 목공예를 전승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 분야에 정성을 다하여 사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늘, 이후 자손들은 가업이 길이 빛나도록 갈고 닦고 할지니라. "

"간부후보생 시절에 첫 월급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화폐 개혁 전 3천원 정도 받았던 것 같아. 화폐 개혁 후에는 군대에서 1만2천원 정도의 봉급을 받았을 거야. 지금은 매달 전라북도에서 ‘무형문화재’에 지원하는 70만원과 공방을 경영하면서 얻는 수익금을 합하면, 한달 수입이 대략 300만원 정도야. 이 정도면 손자들에게 용돈을 주고 주위 사람들의 애경사를 서운하지 않게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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