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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마을의 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3004
한자 白日마을의 歷史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마을
집필자 강정만

마을 유래

본래 운봉산내면 지역으로 통내(通內) 또는 백일(白日)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동수리, 서수리, 저전리, 하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백일리라고 했다. 마을 뒤에는 백운봉이 솟아 있고, 지리산 천왕봉이 우뚝 솟아 있어 아침이면 백운봉과 천왕봉에 솟아오르는 태양이 깨끗하고 맑게 비치는 마을이라 하여 백일(白日)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때는 동수, 서수, 백일, 저전 등 독립 마을이기도 하였으며, 1914년부터 백일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말엽 1310년경 청도 김씨 일가가 전주 지방에서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원백일(元白日) 마을에 처음 정착하였다가 몇 년 후 백일로 옮겨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일명 통내라고 한다. 마을 위치가 경남 함양군 마천면으로 가는 입구로서, 대사찰 실상사(實相寺)(사적 309호) 입구가 되기도 하여 많은 인가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또 장자터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니 1900년대에는 100호가 넘는 대촌이 형성되었고, 1914년에는 백일리 493번지에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를 설립하게 되어 산내면의 소재지로서 1971년까지 61년 동안 유지하였다. 1972년 면사무소가 대정리로 이전하여 현재는 원백일, 백일, 저전 등 3개 취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828년 통일신라 말 실상사가 창건되면서 사찰의 관문이 되어 옛날부터 몇 백 명의 승려들이 드나드는 대촌으로 흥하였다 하며, 1920년경 동서-마천간 지방도가 마을 중심부로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1914년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를 설치하고 1937년에 산업조합이 설치되어 소재지가 되었다. 마을 뒤에는 백운산이 솟아 마을의 구조가 가파른 경사지에 위치하여 있으며, 마을 앞으로 낙동강 상류인 만수천이 흐르고, 마천과 연결되는 지방도(국가지원지방 60호, 함양 우회도로)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여 정기 여객이 빈번이 왕래하고 있다.

옛날 차량 통행이 적을 때는 마천과 상거래가 많이 이루어지기도 하여 경제 생활권이 함양에 속했던지라 언어도 경상도 사투리를 닮게 되었다. 농업을 주로 하고 있지만 농외 소득원으로 목기 공장 고용, 한봉 사육, 실상사 관광객에게 내고장 특산품 판매 등 생활권역 확대로 도농간의 작업을 동질화하고 있으며, 자연산과 같은 독특한 향기가 있는 취나물 작목반의 운영의 내실화를 꾀하고 있다. 경남 마천면과 면계에 부연(釜淵: 가마쏘)이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정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민씨가 쏘에 투신하였다 하여, 그 정절을 추모하는 제각이 있고, 실상사 입구에 석장생(石長生) 2주가 있어 사찰의 역사를 상징하듯 지켜보고 있다.

역사적 사건

6·25 동란 때 뱀사골에 은거하고 있던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가 산내 지서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치열한 총격전 속에 군경은 달아나고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근년에 들어와 백일마을은 태풍 피해가 여러 차례 있었다. 2002년 8월말 태풍 ‘루사’가 마을을 강타하더니, 복구가 다 끝나기도 전에 2003년 9월에 ‘매미’가 또 마을을 덮쳤다. 2005년 여름에도 산사태가 나서 피해를 입었고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길과 다리가 훼손되어 큰 불편을 겪었다. 매번 수해가 날 때마다 군인들이 달려와 복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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