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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할아버지 시대의 의식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2015
한자 김종한 할아버지 時代의 衣食住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집필자 이민우

6. 김종한 할아버지 시대의 의식주(衣食住)

1) 의(依)

옛날에 여름에는 삼베(삼), 겨울에는 명베(목화로 만든 무명)로 만든 옷을 주로 입었다. 이러한 옷은 자급자족하였다. 또한 어렸을 때는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고무신 신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아주 부자 몇몇만 운동화를 신었다. 책가방도 없고 책보라고 해서 어깨 뒤로 둘러서 묶고 다녔다. 일할 때는 특별히 근무복이 별도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남자들은 단벌밖에 없으니까 주로 웃통 벗고 일했다. 그 당시에는 살기가 참 어려웠다. 어머니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세탁한 것 다리고 양말(버선이라고 함)도 꿰매고 등등의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호롱불 밑에서 일했다. 나무에다가 호롱을 달아서 불을 피우면 그을음이 나고 그랬다. 보통사람들은 호롱불을 이용하였고 부잣집은 남포동을 씌웠다.

평상시에 입는 옷으로는 1년에 명베로 만든 한복 2-3벌씩을 만들어 입었다. 특히 여름에는 자고 일어나면 일을 해야 하니까 땀이 많이 옷에 베어서 자주 빨아 바꾸어 입어야 했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 때와 같은 명절에도 특별히 옷을 장만하곤 하였다. 이러한 옷들은 집에서 아내가 세탁, 수선하여 결혼할 때 가져온 농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옷이 없어서 못 입었지 옷을 입을 때 특별히 금기시하거나 꺼리는 경우는 없었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겨울에도 여자들조차도 내의가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나 내의가 시장에 나왔는데, 그것도 부자들이나 사서 입을 수 있었다.

2) 식(食)

옛날의 주식으로는 주로 보리와 쌀 각 절반씩을 섞어서 밥을 해 먹었다. 쌀농사를 지으면 약 절반 정도를 일본인들이 공출하였기 때문에 감추어 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마지기 당 일정량을 항상 공출로 빼앗아가니까 충분히 먹지를 못하고 부족하여 이자 30% 정도로 쌀을 남의 집에서 빌어먹어서, 다음 해에 농사를 지어도 농사 비용과 이자를 주고 나면 별로 남지 않고 항상 부족하였다. 쌀이 떨어지면 보리밥을 해먹었는데, 한참 곤란할 때에는 보리도 없어서 산에서 소나무 껍질과 두부 만드는 데에서 두부 찌꺼기 등을 가져다 먹기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반찬은 밭에다 배추, 무, 파, 상추 등을 심어서 먹고 쑥 같은 것들의 자생 식물 등을 자급자족하여 먹었다.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먹을 만한 것들도 없어서 군것질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닭이 흔해서 잘 먹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부잣집이나 닭고기, 쇠고기 등의 고기를 간혹 먹을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닭도 거의 먹지 못했으며 쇠고기도 1년에 평균적으로 세 번 정도 즉, 설, 호주 생일, 추석 등의 날에 쇠고기 한두 근 사다가 국을 끓여 온 식구들이 모여 같이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운 생활을 하였었다.

손님들이 왔을 때 특별히 차려 놓는 반찬으로는 김치는 항상 있고, 싱건지 등 무로 만든 반찬을 계절에 따라 2-4종류를 만들어 내놓았다. 또한 고사리, 무말랭이, 박조가리 등을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으니까 모두 건조시킨 후 보관하고 있다가 멸치 등과 함께 볶아 조리하기도 하였고 콩나물을 많이 재배하였다. 계절에 따라 주로 먹는 음식으로는 봄에는 쑥, 두릅 등 야생초를 주로 먹고, 여름에는 주로 미나리를 사다가 삶아서 초를 쳐서 먹고 풋고추와 된장 및 상추로 쌈을 해서 먹었다. 가을에는 실가래, 토란 등으로 국을 해서 먹고, 겨울에는 주로 콩나물국을 끓여 먹었다.

제사 때는 삼실과와 어동육수라고 해서 조기, 명태 등 기본적인 것들을 대중없이 마련하였다. 부잣집에서는 돼지머리, 소족, 굴, 대구 말린 것, 숭어, 병치, 상어, 돔, 전어 등 많은 것들을 마련하였다.

평상시에 마시는 술로는 탁주(막걸리) 혹은 소주를 만들어 마셨다. 탁주는 쌀을 삶아 쪄서 꼬두밥으로 만들어 이에 콩을 쪄서 발효시켜(누룩이라고 함) 이것을 꼬두밥과 함께 띄우면 탁주(막걸리)가 되고 그것을 내리면 맑은 술(청주)이 된다. 소주는 찹쌀을 불에 데울 때 나오는 수증기(김)가 나오면 이를 받아 놓으면 소주가 되었다. 그러나 소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구 등도 필요하고 일거리가 많아서 일반 보통 집에서는 막걸리나 만들어 마셨다. 술 마실 때의 안주로는 김치는 필수고, 마실 국은 있어야 했으니까 제일 흔한 것이 명태여서 명태국이나 마른 명태를 막대기로 팡팡 때려서 고추장이나 된장 등에 찍어 안주로 삼았다.

집안은 옛날에는 불교를 믿었는데 선고로부터는 한학을 배워서 지금은 향교를 다니고 있다. 향교에서는 특별히 가리라는 음식은 없고 삼강오륜을 실천하라는 것이 주된 것이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나 천주교 등 많은 종교들이 있으나 옛날에는 종교라고는 주된 것이 불교밖에 없었으므로 종교적인 이유로 가정에서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었다. 또한 집안 뒤뜰에 있는 장독대를 중요시 여겨서 이 부근에서는 싸움 등을 하지 말아야 했다.

3) 주

현재 살고 있는 주택의 형태는 한옥으로, 6·25 때 소실되어 다음 해에 지은 것이다. 1950년 6·25 발발 후 7월 초경에 산동면으로 1주일 정도 피란 갔다 왔더니 집이 모두 소실되어 있었다. 우리가 피란 간 사이에 인민군이 마을에 차를 주차해 놓아서 호주기(호주산 전투기)가 와서 폭격하여 동네가 불바다가 되었던 것이다. 피란 갈 때 가족들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다른 곳으로 흩어져서 갔고, 보리 등 중요한 것들은 땅 속에 묻어 놓고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까 폭격 때문에 다 타버려 연기가 나고 있었다.

주택은 직접 소유하고 있으며 대지는 150평방미터이고 2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동은 기와집으로 직접 사용하며 방과 서재, 부엌, 그리고 욕실로 구성되어 있다. 아랫채는 슬레이트 집으로 방이 여섯 칸이 있다. 자취방으로 활용하였다. 옛날에 우리 집안에 모시는 신으로는 우리 어머니 시대에는 옥황상제에게 바친다고 아침마다 부엌에 물을 떠 놓고 쌀을 놓고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를 포함하여 집안에 모시는 신은 아무 것도 없다.

김종한 할아버지 개인 연표

1924년. 남원시 향교동 구암마을에서 출생

1931년. 남원 용성보통학교 입학

1937년. 남원 농업고등학교 입학

1940년. 금융조합 취직

1944년. 김영애와 결혼 후 3남 3녀를 둠

1946년. 남원 농촌지도소 취직

1949년. 세무공무원 시험 합격

1953년. 농촌운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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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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