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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아저씨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1021
한자 김동호 아저씨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집필자 서정섭

출생과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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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아저씨

김동호 아저씨의 연세는 49세로, 태어나실 때 특별한 태몽은 없었다고 한다. 본관은 김해 김씨이다. 본래 고향은 전남 구례군 영암인데 할아버지 때 남원 송동면에서 한때 거주하다 노봉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김동호 아저씨는 노봉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저희 집은 전남 구례 영암이예요. 구례 영암은 곡성 지나서라고 하던데 가보지는 않았어요. 구례에서 살다가 송동면 신촌리에서 좀 살으셨던가 보더라고요. 노봉마을에는 할아버지 때 왔지요. 저의 탯자리는 여기 노봉입니다.”

“구례 영암에서 노봉으로 이사를 오게 된 이유는 옛날 어른들 말을 들어보면 못살다 보니까 잘 사는 데를 찾아다니다 여기로 오게 됐어요. 소개로 해서 여기가 먹고 살기가 넉넉할까 해가지고 왔죠. 할아버지 때 어렵게 사셨죠. 그때는 누구나 다 힘들지 않았습니까?”

김동호 아저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특히 부친의 천식 병이 깊어 약값을 마련하는 데 돈이 많이 필요해서 중학교만 졸업하고 가사를 돌보며 가정을 책임져야만 했다.

“학교는 용북중학교를 졸업했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만 졸업했어요. 학교 다닐 당시에 아버님께서 천식으로 병이 깊어서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그래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어요.”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은 마라톤을 시키려 했던 선생님과의 사건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기억나는 선생님은 많죠. 물리를 가르치신 김현태 선생님, 주로 담임을 하셨던 김봉호 선생님, 윤한조 체육 선생님 등등 생각이 나죠.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과 관련해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윤한조 체육 선생님이시죠. 제가 육상을, 마라톤을 좀 했거든요. 윤한조 선생님한테 되게 맞은 기억이 있죠. 저는 힘들어서 안 흘려고 허고 그 선생님은 계속 시킬려고 흐고 그랬죠. 숨어서 있고 했는디 한번은 구둣발로 확 차버리더라고요.”

김동호 아저씨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저는 김동호(49세)이고, 1남 2녀를 뒀어요. 아버지는 김 태자, 판자, 김태판이신데 1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77세이시구만요, 그 당시는 62살 잡수셨어요. 어머니는 조오남(75세)씨이신데 함께 살고 있어요.”

“자식은 큰애가 딸인데 김미라(22세)이고, 둘째도 딸인데 영원(20살)이고, 막내가 아들인데 영준(19살)이예요. 아들은 지금 남원고등학교 3학년인데 기숙사에서 다니고 있어요. 큰딸 미라와 둘째 영원이는 지금 전주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딸 둘은 전주에서 생활하고 막내아들은 남원 시내에서 기숙사에서 있으니까 아들, 딸들하고는 다 떨어져 살죠.”

가족의 수입원(생산/소득)은 논농사와 복숭아 과수원 등이다.

“제가 벌고 뭐허고 한 것이 대략 3,000만원 정도 되죠. 경제권(살림)은, 돈 관리는 모두 제가 하죠. 왜냐하면 농협 조합을 다녀야 하는데 안사람한테 맡기면 농협이 머니까 나가기가 어렵잖아요. 나는 차를 타고 다니니까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죠. 자연스럽게 내가 돈 관리를 하게 되죠.”

“요새는 아이들 교육비가 많이 들지만 옛날에는 아버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아버님이 천식이 있어가지고 한 20년 동안 고생을 하셨어요. 그때 돈이 많이 들어갔지요. 천식은 나았는데 나중에는 골수암이 생기셔서 골수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학교를 중학교만 다녀야 했어요. 제가 농사를 하고 노동일 하면서 벌어가지고 병 수발하고 그러면서 돈을 벌어서 살아왔죠.”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후에는 요새는 제가 돈을 좀 모았죠. 정부 보조도 받고, 기계화 단지가 되어가지고 기계를 사서 마을 일도 하고 해서 돈을 조금 모았지요. 콤바인 가지고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운봉, 산내, 이리, 익산까지도 가서 콤바인가지고 벌이를 했어요. 차에다 콤바인을 싣고 가서 한 열흘, 이십일씩 일을 하고 왔어요. 동네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외지로 나가서 일을 했어요. 한 번씩 나가서 일을 하고 오면 열흘에 한 200-300만원은 벌어왔어요.”

“요새 같으면 아이들 학비가 상당히 많이 나가요. 학비가 학기당 270-80만원 그러니까 한 300만원 되고, 자취를 하니까 집값이 1년에 170만원, 잡비가 한 달에 15만원씩, 애들이 셋이나 되니까 무시 못하겠데요. 한앞에 1000만원씩은 묶어놔야 것데요.”

김동호 아저씨의 부친은 전남 구례가 고향이신데 노봉마을로 이사를 왔고, 김동호 아저씨는 노봉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전남 구례에서 사시다가 할아버지 때 노봉마을로 오셨어요. 할아버지의 형제간은 3남매이신데 2남 1녀이셨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두 번째이셨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김 흥자, 렬자 김흥렬이셨어요. 할머니는 윤씨이셨구요. 큰할아버지의 성함은 잘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런데 고모 할머니의 시댁이 송동면 신촌마을이었어요. 할아버지 형제분이 구례에 같이 사시다가 고모 할머니의 시댁인 송동면 신촌마을로 함께 이사를 해서 살았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고모할머니 시댁이 있는 송동면 신촌마을이 그래도 먹고 살기가 괜찮다고 해서 송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셨어요. 아버지가 첫째이시고 둘째 작은아버지는 군대 가서 돌아가셨어요. 군대 생활을 하시다가 지뢰를 밟아 돌아가셨다고 해요.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25 이후인 것 같아요. 셋째 작은아버지가 부산에 사시고, 고모는 노봉마을에 사시다가 고모부의 고향인 대산면 감성마을로 이사를 가셨어요. 살기가 힘드니까 노봉마을에 와서 살다가 시댁마을로 이사를 가신 것이죠.”

“우리 아버지는 3남 4녀를 두셨고, 부산에 사시는 작은아버지는 남매 1남 1녀를 두셨고, 고모는 아들만 5형제를 두셨어요.”

“친척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주로 서울에서 살고 있고, 작은아버지는 부산에서 사시고, 다른 친척들은 노봉마을에서 살고 있어요. 친척들 간의 교류는 남매들간에 모임이 있어요. 항상 매년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만나요.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모임을 준비해서 만나서 먹고 놀고 쉬었다 가요.”

혼인

부인 윤재선 아주머니와 혼인하게 된 동기는 남원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 연애 후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씀한다.

“결혼은 연애 결혼을 했어요. 우연히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죠. 젊은 시절에 남원을 가가지고 우연히 남원역을 갔는데 어떤 예쁜 아가씨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차 한 잔 하자고 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죠. 데이트 한 번 하자고 했더니 하라고 하더라고요. 한 3년 데이트, 연애를 했죠. 결혼식은 남원에 있는 예식장에서 했어요. 제가 28살에 결혼을 했거든요. 제가 결혼은 했지만 부모님이 계시니까 아직 애기로 보고 철없이 지내다보니까 어느 세월에 아버님이 아프시다 보니까 제가 당연히 살림을 맡아서 허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었어요.”

“아버님이 아프시니까 돈이 아니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일을 했어요. 노가다(막노동)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아침밥만 먹고 거름도 내줬어요. 저기 부잣집 종가집으로, 그 밑에 종가집의 작은 집으로 다니면서 아침에 똥장군 지고 똥도 퍼주고 거름도 내주고 그랬어요. 저도 그렇게 세월을 보냈어요. 모내기 해주고, 로타리 쳐주고 그랬어요. 어렸을 때 경운기를 사가지고 경운기로 돈을 벌고 그랬어요.”

통과의례

“백일잔치, 돌잔치는 그때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백일잔치, 돌잔치 이런 것은 안했죠. 그냥 윗목에다 미역국이나 한 그릇 끓여놓고 그런 거죠.”

김동호 아저씨 자신의 생일 잔치는 아직 젊기 때문에 하지 않고 어머님의 생일 잔치는 한다고 말한다. 임신/출산시에 피하는 음식은 특별히 없단다. 부친의 건강이 좋지는 않았지만 마을 잔치의 회갑연을 하였다.

“아버님은 회갑을 보도시 지나고 돌아가셨어요. 62세에 돌아가셨는데 아프셔도 회갑연을 추리기는 추렸죠. 마을 잔치를 했죠, 사매면 손님들을 접대하고 그랬는데 돼지 잡고, 동동주 만들고, 소주나 맥주는 사오고 했죠. 15년 전이니까. 1990년 정도가 되는데 그 당시에 노래 반주기인 가라오케를 빌려다가 노래하고 놀았죠. 아버님이 움직이지는 못해도 앉아 있을 수는 있어서 사진도 찍고 했죠.”

“회갑연의 의례복은, 아버님 회갑연에는 한복을 해드렸는데 두루마기까지 했었죠. 아버님과 어머님의 한복은 딸들이 하고, 누님들 그러니까 고모님들의 한복은 아들인 제가 했죠. 서로 분담을 해서 만들었어요.”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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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아저씨 주택

마을 주택가의 배치는 마을의 지형에 따라 길게 늘어져 있다.

“우리 마을은 길쭉하게 배치가 되어 있는데 제일 위쪽을 원뜸, 가운데를 중뜸, 가운데뜸, 밑에를 아랫뜸이라고 해서 4등분을 했었대요. 옛날에는 마을이 커서 4등분이 됐었는디 지금은 3등분이 돼서 원뜸, 중뜸, 아랫뜸이라고 하죠.”

“우리 집은 한옥과 양옥이 각각 한 채씩 있죠. 몸채는 한옥인데 원래는 돌아가신 작은아버님하고 아버님이 성조를 했어요. 언제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런 후에 제가 한 17년 전쯤 입식으로 바꿨어요.”

“지금 양옥으로 된 이 건물은 옛날에는 행랑이었어요. 광 하나, 방 하나, 화장실, 소막, 돼지막 이렇게 쪽 있었어요.”

“집의 대지는 138평인데 건물은 두 동이 있어요. 한옥 한 채와 양옥 한 채가 있는데 건평이 각각 20평씩이예요. 한옥은 방이 3개이고, 부엌 1개, 거실 1개가 있고, 양옥은 방 2개, 창고 1개인데 방 1개에는 주방 시설이 같이 되어 있어요. 한옥은 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을 17년 전에 입식으로 바꿨고, 양옥은 금년에 새로 지었어요.”

“한옥은 지금 어머님이 사용하고 양옥은 우리 부부가 사용하고 있어요. 한옥에는 큰 방을 어머니가 사용하시고, 옆에 큰 방 하나는 내가 예전에 사용하던 것인데 지금은 비어 있죠. 지금은 아이들도 없고 해서 어머님하고 우리 부부만 사용하고 있으니까 공간이 넉넉하죠.”

“금년에 행랑채를 허물고 양옥을 새로 지었는데 집을 지을 때 특별히 피해야 하는 것들은 없었어요. 그냥 제가 나름대로 지었어요. 저쪽 한옥이 명절이나 식구들이 다 모일 때는 좁아서 금년에 새로 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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