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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순 할머니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1016
한자 최이순 할머니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집필자 서정섭

혼인과 시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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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순 할머니

최이순 할머니의 친정은 임실군 강진면 백련리인데 지금은 전주로 이사를 가서 전주에서 살고 있다. 최이순 할머니가 시집은 20살 때 왔는데 당시 신랑인 할아버지(이영무, 현재 73세)는 19살이었다. 당시 결혼을 주선한 중신어미는 시댁인 노봉마을의 아랫몰에 살던 윤놀이어매인데 지금은 작고했다. 윤놀이어매는 그 할머니의 아들 이름이 김윤놀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윤놀어매는 평소에 할머니의 친정인 강진면 백련리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주 다녀갔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낯선 사람들이 친정으로 찾아왔다. 윤놀어매와 시어머니가 임실 강진의 친정으로 찾아온 것이다. 당시 할머니는 이 사람들이 선보러 온 사람들인 줄도 모르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중신애비를 한 사람은 양가를 다니면서 절반 이상은 거짓말을 하면서 혼인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그래야만 혼례가 성립되니까. 그 사람이 당시에 뭐라고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이 있다고 말을 해서 혼례가 성사되었을 것이라고 할머니는 추측한다. 친정 부모님들이 말하기는 그쪽은 좋단다라고 해서 사성 받아가고, 날 받아가고 그러면 당사자인 할머니는 아무상도 모르고 덮어놓고 와서 사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다. 그 당시는 구식이라 선을 볼 줄도 모르고 그 사람이 안 좋으니까 안 간다고 말할 줄도 모르고 아무 짬도 모를 때였다.

처음 와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처음 와서 마음에 들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부끄럽고 외롭워서(어려워서) 이녁 식구라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그냥 살다보니까 이물어져서(친숙해져서) 그렇지 어느 순간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게 자연스러운 생활이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시집올 때는 18살에 인공(인민공화국, 북한군이 쳐들어 온 때)인 때라 길이 막혔고 산에서 사람을 잡아가고 그런 때라 차도 있고 교통이 좋은 곳은 가마로 떼메고 가고 그러지만 할머니 동네는 교통이 나쁘니까 아주 첩첩산중 길로 걸어서 시댁에를 왔단다. 오는 길에는 백재라는 높은 산이 몇 개가 있으니까 가마를 타고 온다고 해도 절반 이상은 걸어서 왔다. 가마를 끌고 오는 사람들은 빈 가마로 오고 할머니는 계속 걸어서 왔다.

그때 중신애비인 윤놀어매가 걸어오면서 “저기 저 골짝에서 빨치산이 사람을 많이 죽였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을 들은 할머니는 “아따, 무섭데.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가 직일라냐 어떨라냐 싶데.”라고 말했다. 신부인 할머니는 중신애비에게 “할머니,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무섭소. 그런디 할머니는 어떻게 이런 산줄을 넘어다녔오.”라고 물으니까 자기 오라버니가 여기 백태(백재) 넘어에 홀아비로 살고 있어서 밥도 해줘야 하고 하니까 그냥 다녔다고 말했단다.

그러면서 중간중간에 몇 집씩 있는 곳이 있으면 그 곳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곤 했다. “여가 짚은 골이여잉. 여그서 빨치산들이 사람 많이 죽였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각시는 워낙 그 곳이 악산이라 넘어지려고 해도 달리 방도가 없으니까 참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깔막(급경사)이라 엎어지려고 할 정도니까 그냥 걸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겨우 여기 밑에 동네 수몰 앞에 오니까 길이 좋고 그러니까 그 곳에서 신부에게 가마를 타라고 해서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

할머니는 음력 10월 2일에 신행을 왔는데 그때는 눈발도 실실 내리고 해서 추웠다고 한다. 날이 쌀쌀했다. 친정 마을을 출발해서 깊은 산중 산 속을 걸어서 시댁에 올 때까지 걸린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한 나절, 하루 종일 걸렸을 거라고 한다. 해가 넘어가도록 걸어왔으니까 몇 시간이 걸린 줄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오다 쉬다 땀나는 줄도 모르고 깐닥깐닥 하루 점드락(저물도록) 왔다고 한다.

시집을 오니까 시아버지는 몇 살인 줄 모르고, 시어머니는 46세이었다. 당시에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였다. 그 높은 재를 넘어서 선을 보러 왔었다. 그때는 도구통에다 나락을 찧어서 해먹을 때라 도구통에다 나락을 두벌 찧고 있으니까 윤놀어매하고 둘이 친정집으로 들어오는데 누가 오는가 하고 도구통을 찧고 있는데 신부인 할머니를 쳐다보도 않고 마루에 딱 앉았다고 한다. 친정어머니는 들에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도 않아서 윤돌어매하고 둘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해쌓다고 한다. 친정어머니가 느지맥이(늦게) 와가지고 이야기를 해쌓는데 할머니가 “누구단가.”라고 물으니까 “선보러 왔단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누가 시어마이단가?”라고 하니까 “저기 저 양반이 시어마이란다.”라고 그래서 그냥 그런갑다 했단다.

그러고 나서 그 양반들은 점심 좀 먹고 나갔는데 백태(백재)와서 자고 갔다고 한다. 백태는 할머니의 친정 동네에서 10리 길이라 갈 수가 없어서 그 곳 아는 집에서 자고 갔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젊으셔서 시집살이를 많이 시켰을 것 같다는 질문에 바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대부분 시어머니 흉을 보는 시집살이 이야기는 꺼려한다. 왜냐하면 시어머니 흉을 보면 불경죄에 해당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돌려서 물어보아도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이순 할머니의 경우는 예의상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래 시어머니는 마음이 후해서 “그 양반은 그러지 않어.”라고 말하고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았다고 열심히 이야기하신다.

시집살이 이야기를 해달라는 계속되는 재촉에 마지못해 하는 이야기가 동네 샘에서 물 긷는 이야기다. 그 전에는 동네 샘이 하나여서 하루에도 샘을 열다섯 번은 더 다녔을 거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다 소도 물 주야제, 소죽 끓여야제, 사람 먹을 것 갖다 놓아야제. 새복부터 물지러 다니는 것이 한 열댓 번은 다녀야 헐 것이여.” 동네 샘은 마을의 아래쪽에 담을 만들어 놓은 곳에 두룸박샘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고 다니면 시어미는 길삼한다고 다니고 특별히 까시랍게(까탈부리다는 뜻) 하지도 않았단다. 시집살이라고 해봐야 하절(하절기)에는 밭 매고 들일하고 겨울에는 길삼하고 집에서 밥 해주고 따라다니면서 일하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한다.

자녀 양육과 출가

할머니는 자녀를 3남 3녀를 두셨다. 아들딸 모두 결혼하여 객지에서 살고 있다. 큰딸은 53살, 둘째딸은 47살이다. 딸들은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고, 큰아들은 42살로 전북 익산에, 작은 아들은 서울에 살고 있다.

통과의례

할머니는 자녀를 3남 3녀를 두셨다. 처음에 딸만 내리 3명을 낳아서 시어른들과 할아버지 등 가족들이 모두 서운해 하셨단다. 딸만 낳는다고 어른들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단다. 야단하고 그렇지는 않았지만 “애기 낳은 사람이 어디서 도둑질한 것맹이로(처럼) 미안해하고 그렇게 살았지 뭐.”라고 술회한다. 그런 후 아들을 3명 계속 낳았다. 큰아들을 낳으니까 평화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 전에는 딸만 낳아서 마음고생이 많으셨다는 의미이다.

딸만 낳아서 미역국도 못 얻어드신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때는 미역이 귀한 때라 누구나 다 마찬가지였어요.”라고 말한다. 머리 땋는 댕기만한 미역을 세 가닥 준비해 걸어두고서 미역을 조금씩 떼어서 먹었단다. 지금은 먹고 살기가 괜찮으니까 미역이 흔하지만 당시는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미역국에 소고기를 넣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전에는 맹물에다 그냥 미역을 넣어서 끓여먹었단다. 미역국도 제대로 얻어먹기가 힘들었고 미역은 어른들이 사다 놓았기 때문에 가격이 얼마나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애기 낳을 때는 시어머니가 집에 있으니까 시어머니께서 받아주셨고, 태몽은 특별히 꾸지 않았단다. 돌잔치는 돌떡을 해서 이웃에 나눠주었다. 돌떡은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서 큰 시루에다 안쳐서 시루떡을 하고 밥을 해서 동네 사람들 오라고 해서 나눠 먹고 했단다. 돌상은 미역해서 갖다 놓고 대충 차려놓았다. 딸들은 돌도 안 차려주었고 아들들만 돌상을 차려주었단다.

예전에는 모두 다 구식 결혼식을 했다. “시방이니까 예식장법이 있지 예전에는 그랬까디.”라고 하면서 당시를 떠올리신다. 친정 마당에 차일을 쳐놓고 대례상을 준비한다. 상에는 댓잎과 솔잎을 꽂아놓는다. 그때는 전쟁의 난리 끝이라 제대로 격식을 차리지도 못했단다.

할머니는 여자여서 회갑도 찾지 않았고 할아버지만 회갑 잔치를 했다. 할아버지 회갑 때는 동네 사람들 다 초대해서 밥 한 끼 먹고 술 먹고 다들 어울려서 놀고 그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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