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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마을의 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1004
한자 露峰마을의 歷史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집필자 서정섭

마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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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마을 입구

사매면(巳梅面)은 사동방(巳洞坊)과 매내방(梅內坊) 또는 매안방(梅岸坊)이 있었던 지역으로, 1897년(고종 34)에 8도를 13개 도로 개편하면서 2개방(사동방, 매안방)이 면으로 바뀌어, 사매면이 되었다.

본래 남원군의 사동면과 매내면 또는 매안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매내(안)면의 상신(上新), 중신(中新), 하신(下新), 신촌(新村), 세촌(細村), 풍촌(豊村), 관촌(官村), 대산(大山) 등 8개 리(里)와 사동면의 서원(書院), 도촌(道村), 수동(壽洞), 계동(桂洞), 인화(仁花), 화정(花亭), 서촌(西村, 書村), 대율(大栗), 덕평(德坪), 수월(水月), 손율(孫栗) 등 11개 리, 그리고 적과면(迪果面)의 오현리(梧峴里) 일부를 병합하여 사동면과 매내(안)면의 이름을 따서 사매면이라 하고 서도(書道), 계수(桂壽), 인화(仁化), 화정(花亭), 대율(大栗), 월평(月坪), 오신(梧新), 관풍(官豊), 대신(大新) 등 9개 리(里)로 개편, 관할하게 되어 오신리(梧新里)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서도리(書道里)는 본래 남원군 사동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서원리(書院里)와 도촌리(道村里)와 병합되어 서도리라 하고 사매면(巳梅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가 되었다. 서도리에는 노봉(露鋒), 수촌(藪村), 서촌(書村) 등이 있다. 노봉마을 앞에는 서촌마을이, 좌측으로는 수촌마을이 있다. 수촌은 오래된 촌명은 아니다.

서도리 노봉마을은 남원군 사동면 서원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서원리와 도촌리를 병합하여 서도리라 하고 서도리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됨에 따라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가 되었다. 서도리에는 노봉, 수촌, 서촌 등이 있다.

노봉마을이 생성된 내력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호성암(虎成庵)과 노유재(露濡齋) 등의 유래를 참고해 보면 신라 말이나 고려 초쯤으로 추정된다. 본래는 마을 앞거리에 사람이 살다가 계곡 쪽으로 옮겼다고 전해온다. 그 후 1400년 후반에 삭녕 최씨(朔寧崔氏)가 정착하여 최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되었다가 오씨, 김씨, 차씨 등이 들어와 오늘에 이른다.

노봉이라는 이름의 유래

처음 이 마을의 이름은 서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 발행된 지명 자료에 따르면 현재의 지명인 노봉마을이 없을 뿐 아니라 이곳에 노봉서원(露峯書院)이 있었기 때문에 서원리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노봉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 뒤에 있는 노적봉풍악산의 줄기에 노적을 쌓은 듯이 우뚝하게 들어나 있어 여러 선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고, 전라감사였던 이서구(李書九)가 남원부에 행차 도중 율치(栗峙)를 지나다가 노적봉을 바라보고 ‘군자의 가거지(可居地)’라고 칭찬했다는 설이 있는데, 노적봉의 우람하고 군자다움과 계관봉(鷄冠峯)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드높은 기상이 쌍벽을 이루면서 생겨난 정기 아래 생성된 마을이 노봉마을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의 위쪽에 위치한 전방(全芳)이에 맨 처음 전씨(全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후 이합집산으로 차차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혼성촌을 이루어 오다가 조선조 중엽부터 최씨들이 대거 이주하여 와서 서원과 더불어 살다가 근세에 이르러 또다시 최씨, 차씨, 오씨, 허씨 등 각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는 충·효의 얼이 높은 마을이다.

삭녕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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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녕 최씨 종가

노봉마을은 삭녕 최씨의 500년 세거지로 유명하다. 원래 삭녕 최씨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이 조선 초기 훈구파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 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한 최항(崔恒)이다. 최항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으로 책록되어 도승지에 올랐고, 형조, 공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최항의 손자 최수웅연산군이 즉위한 후 낙향하여 전북 남원시 사매면에 은거함으로써 삭녕 최씨가 노봉마을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의 5대손 최온(崔薀)[1583~1659]이 폄재라는 호를 사용하여 그의 집안은 세칭 폄재 집안으로 불렸다. 그는 이괄(李适)의 난 때 형 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해산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도 이흥발(李興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재행(才行)과 학식을 겸비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여 언관(言官)의 직책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삭녕 최씨는 대를 이으며 문과에 급제, "6대 등과"로 이름을 떨쳤다. 이 가문은 10현 8한림 5대 진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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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의 최명희 문학비

노봉마을을 배경으로 한 대하 예술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최수웅의 17대손이며, 그의 아버지 최성무는 일본 동경교대 유학을 했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어머니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출신으로 재야의 사상 철학자이자 한학자인 허완의 장녀다.

전방촌의 유래

노봉마을에는 현재 혼불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는 곳에도 마을이 있었다. 거기를 전방촌이라고 했었는데 이 전방촌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삭녕 최씨 사적을 더듬어 보니까 폄재공의 장조카 최휘지(崔輝之)가 전방에 와서 서원 관리도 하고 살았다고 되어 있다. 전방촌은 오로 전(專) 자에, 꽃다울 방(芳) 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씨 일가들 사이에서도 전할 전(傳) 자라고 해야 말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설이 분분하다.

노봉 마을의 역사적 사건

노봉마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은 수해로 산사태가 난 적이 있다. 1923년 노봉마을에 호성암 북쪽 골짜기가 무너져 내리는 산사태가 있었다. 그 외에는 6·25 때도 큰 사건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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