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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180
한자 長生
영어음역 jangseung
영어의미역 guardian post
이칭/별칭 장생(長栍),장생(長生),돌장승,장승,석장승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집필자 오종근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기고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운 푯말.

[개설]

장승은 지역간의 경계나 이정표 구실은 물론이고 마을의 수호신 역할도 담당하였다.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표시도 없고 천하대장군류의 표시도 없었다. 마을의 신앙 대상으로서 주로 액병(厄病)을 빌었다.

남원에 산재한 장승은 모두 23기로, 동부 산간 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가 수많은 전투를 하였던 접경 지역인 만큼 마을의 생존권이 달린 존망의 기로에서 마을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 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남원 지역에 있는 장승들은 기능적으로 “비보(裨補)로서의 장승”과 “불법 수호로서의 장승”, “기자(祈子)로서의 장승”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대개 마을이 풍수지리적으로 잘 자리했는가의 여부가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였기 때문에, 장승은 지리적으로 부족한 기운를 채우거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로서 기능한 측면이 강하다.

운봉읍 서천리북천리의 장승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서천리 장승은 운봉 서쪽이 공허하여 지기가 흘러 빠지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돌장승을 세워 진호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운봉이 배의 형국이라, 남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나 북서쪽이 허하므로, 북쪽과 서쪽 두 곳에 장승을 세워서 허한 기운을 막고자 한 것이다. 1970년 5월 20일에 민속자료 제2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서천리 동장승에는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의 명문이 새겨져 있고, 북천리 장승에는 “서방축귀장군(西方逐鬼將軍), 동방축귀장군(東方逐鬼將軍)”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동방축귀장군은 여느 장승과 마찬가지로 귀면괴수형(鬼面怪獸形)의 얼굴이지만, 서방축귀장군의 온화한 표정과 길다란 귀는 부처님을 연상하게 한다.

권포리에는 마을 입구에 2기, 마을 안쪽에 2기의 장승이 있다. 마을 안쪽에 있는 장승은 조산과 위치를 같이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조산을 조탑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조탑과 장승 모두 풍수 비보 기능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권포리의 주산인 고남산이 남동향으로 마을을 품고 있고 마을 앞쪽인 운봉 방향이 훤하게 트여 있기 때문에, 장승과 돌탑을 방어 및 수호 기능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유곡마을 장승도 지금은 그 기능이 상실되었지만, 마을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앞에 있는 돌장승들은 불법 수호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것으로, 1969년 12월 1일 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4기였으나 1936년 대홍수로 1기가 소실되었다.

왕정동에 있는 만복사지 앞 도로가에도 지상으로부터 97㎝ 정도만 노출된 장승이 있다. 두상이 52㎝로, 머리 부분만 남아 있는 돌장승이다. 머리 왼쪽은 마모되었지만 오른쪽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만복사지 연화좌대 옆에 뒹굴고 있는 불두 형태를 보면 돌장승의 머리 부분과 거의 같다는 인상을 갖는다. 이는 돌장승의 조성 연대와 연화좌대 불상의 조성 연대가 비슷하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당간지주와 5m 정도 떨어진 것으로 미루어 불법 수호의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천면의 순열각 옆에 있는 주천 장승은 미륵으로도 불리는데, 지방 민속자료 제1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아들을 낳지 못한 처자의 꿈에 미륵(장승)이 나타나 아들을 낳게 해줄 테니 집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여인이 아들을 낳고 집을 지어주어서 ‘미륵정’이란 명칭이 남게 되었는데, 지금은 집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장승만 남았다.

이는 장승과 기자신앙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영면 개암주마을의 장승도 아기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들이 정월에 음식을 차려놓고 간단한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기자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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