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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바오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791
한자 石-
영어음역 Seok Baoro
이칭/별칭 석종관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천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인물
출신지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안대동
성별
몰년 1974년 3월 3일연표보기
대표경력 남원 쌍교동성당 신부|마산교구 문산성당 신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활동한 천주교 신부.

[활동사항]

1930년 전라북도의 천주교 교세는 교우 총수 1만 6087명, 본당 12개(1931년 1월 포함)였다. 대구교구 소속이었던 1911년에는 1만 3506명이었던 교우가 20여 년 후에는 1만 6087명으로 2,581명이 증가하고, 본당은 네 개가 증가하였다. 또한 1911년부터 1930년까지 6개의 본당이 신설되었고, 석바오로 신부는 전라북도에서 배출한 신부 9명 중에 한 명이다.

1926년 5월 29일에는 서품을 받은 김필곤(金必坤) 신부가 초대 장수 수분리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부임한 지 1년쯤 되어 결핵에 걸려 고생을 하다가 1928년 2월에 늑막염으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에 따라 1928년 5월 6일 대구 남산동 본당의 석바오로 신부가 수분리 본당에 부임하였다. 석바오로 신부는 수분리 본당에서 문맹 퇴치 운동에 앞장서 소화학원(小花學院)을 세우고 가난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7~1898년경 남원 지방에서만 16명의 성인 영세자가 교적에 올랐다. 이 사실을 기록한 보두네 신부는 남원 지역의 선교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남원 근방의 몇몇 사람들이 입교 의사를 밝혀 보두네 신부는 이들에게 교리 공부에 필요한 책을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이들이 영세하여 훌륭한 교우촌을 형성하기를 바랐다.

이후 남원공소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석바오로 신부가 1928년 5월에 장수 수분리 본당에 부임하였다. 그 이후 뚜렷한 활동이 없었는데, 1932년 장수 수분리성당 소속 김윤문 등 두 명의 신자가 남원으로 이사를 왔다. 이들은 1934년 1월경 남원공소를 설립하고, 장수 수분리성당 석종관 신부를 청하여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해 5월 이들은 남원 읍내 죽항리 3칸 협실의 공소집을 건축하였다. 그 후 수분리성당에서 파견된 김마리아, 정안드레아, 김바르나바 등 여러 전교회장들의 노력으로 예비 신자가 늘어났다.

1935년 6월 16일에는 초대 주임으로 석바오로 신부가 임명되어 남원성당이란 이름으로 본당이 신설되었다. 신자들은 본당이 신설되기 전인 그 해 5월에 이미 죽항리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석바오로 신부는 주택을 먼저 설비하고 나서 8월 20일 부임하였다.

그는 신설 본당의 기초를 닦으면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등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영세자가 200여 명에 이르렀고, 소속 공소 3개와 본당 관할에 신자 수가 23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남자 회장 4명, 전교회장 3명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장수 수분리성당 구요셉의 기부금으로 종탑을 설치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1939년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의 모든 천주교회가 순교 정신을 강화하고, 현양 사업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1939년 9월 24일에 서울 계성심상소학교 대강당에서 ‘한국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창립되었다.

1930년대 말부터 일경은 교회에 일제 천황을 숭배하는 신도(神道) 신앙을 강요하였다. 외국 신부들에게는 신도 신앙을 심하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한국인 신부들이 담당하고 있는 본당에는 일장기를 게양하고, 교우들로 하여금 성당을 출입할 때 일장기 앞에서 경례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모든 성무 집행 때, 즉 미사, 성체 강복, 심지어 조만과(아침, 저녁 기도) 때까지도 참석자들에게 일본 국가를 부르도록 하고, 모든 신자에게 모든 집회 때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마치 ‘주의 기도문’을 외우듯이 하라고 강요하였다.

1940년대에 일제는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에 신붕(神棚)이라고 하는 작은 제단을 설치토록 요구하였다. 1941년 초 겨울에 김제 본당 석바오로 신부는 이러한 일제의 요구에 저항하다가 김제경찰서로 연행되어 엄동설한에 체형을 받고 몇 달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69년에 천주교 마산교구 문산성당에 19대 석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1970년까지 사역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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