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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751
한자 秋水鏡
영어음역 Chu Sugy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화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명나라 귀주성
성별
생년 1530년연표보기
몰년 1600년연표보기
본관 추계
대표관직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史)|완산부원군|호성공신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명나라 장수.

[개설]

세심당(洗心堂) 추수경(秋水鏡)[1530~1600]은 명나라 무강자사로 재임하며 부러움 없는 영화를 누렸으나 이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다섯 아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왜군과 싸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고, 마침내 적의 총탄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전주를 사수한 장군이다.

[가계]

본관은 추계(秋溪). 자는 청하(淸河), 호는 세심당(洗心堂). 추계추씨(秋溪秋氏)의 시조인 중국 남송 추엽(秋饁)의 10대손이다. 또 명나라 건국공신이자 호부상서를 지낸 추유(秋濡)의 5대손이다.

[활동사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명나라에 정곤수(鄭崑壽)와 이덕형(李德馨)을 사신으로 보내어 구원군(救援軍)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황제가 거절하자 이덕형 등은 3일 동안 읍소(泣訴)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는 이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 하는 5만 명의 구원군을 파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당시 추수경은 명나라의 무강자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추수경은 총병아장(摠兵亞將)이 되어 장남인 추노(秋蘆)와 차남인 추적(秋荻)을 좌우익장(左右翼將)으로 삼아 무강의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동정군에 합세하여 12월 25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다음해인 1593년 2월, 추수경은 곽산(郭山)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김응서(金應瑞) 장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개성과 한양을 수복한 후 진주와 동래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597년, 추수경은 남원 전투와 안덕원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고생하고 있었다. 그때 증원군으로 참전한 3남 추국(秋菊)과 4남 추지(秋芝), 그리고 5남 추난(秋蘭)이 진중으로 들어와 다섯 아들을 상봉했다. 추수경은 1600년 9월 9일 71세의 나이로 전주 군영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추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추수경이 죽은 뒤 선조는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증직하였고, 1604년 다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추서하였다. 이후 1866년에 고종은 영정을 하사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추** 추씨가문의 조상님^^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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