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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314
한자 南原鍮器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생활·민속/생활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미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방 특산품|생활용품
재질 청동
용도 의례용|식기용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특산품의 하나로, 청동으로 만든 식용 그릇.

[개설]

유기란 구리에 주석을 섞어서 만든 청동기인 놋쇠로 만든 은은하고 품위 있는 무독 무취의 무공해 식기이다. 유기 중에서도 남원유기는 조선시대부터 질감과 형태에서 다른 지역 제품보다 높게 평가되어 명품으로 꼽혔다.

남원에서 생산된 유기제품 가운데 반상기는 주발·보시기·탕기·대접·조치보(鳥雉甫)·쟁접(錚接)·합(盒)·종지·반병두리·쟁반·수저로 구성된다. 종류에는 3첩 반상기·5첩 반상기·7첩 반상기·9첩 반상기 등이 있다.

그러나 유기는 스테인레스·본차이나 등 새로운 서양 제품에 밀려나는 실정이다. 지금은 운봉 출신의 윤춘열이 동명 성산리에서 가내공장을 차리고 남원유기공예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남원유기는 조선시대부터 안성(安城)의 맞춤유기와 순천(順天)의 궁그름옥성기, 그리고 평안북도의 납청(納靑)방짜유기와 함께 명품으로 꼽혔다. 남원유기는 구한말 이전까지만 해도 궁그름옥성기라 불려 판매되었으나, 순천 제품과 이름이 같다하여 한말부터 남원유기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운봉을 비롯하여 지금의 남원시 화정동왕정동 일대에서 대를 이어온 가내공업으로 생산되어 전국에 판매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병기 제조에 따른 각종 물자 부족으로 일반 가정의 놋그릇마저 공공이란 이름 아래 강제로 거두어가면서 생산이 중단되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남원 지역에서도 유기 생산이 활발해졌으나, 대량 생산을 위해 제작 방법을 바꾸어 종래의 반(半)방짜유기가 아닌 안성의 맞춤유기와 같이 틀을 사용해 만들었다.

다만 농악기의 징과 꽹가리만이 반방짜의 제조 방법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 이 때문에 안성의 맞춤유기, 순천의 궁그름옥성기, 납청의 방짜유기의 제작 기술은 우리 나라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지만, 남원의 유기 제작 기술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옛날 남원산 유기제품은 반상기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유기의 원료인 동·주석과 관련된 향로·촛대 등의 제기와 범종·담뱃대, 그리고 농악기인 꽹과리·징도 생산하였다.

이 가운데 징은 전국에서도 최고 상품으로 꼽는다. 징은 왕정동 강태묵(姜泰黙)이 3대를 이어 전수하고 있다. 이밖에 담뱃대는 왕정동황영보(黃永保), 범종은 김경만(金景萬)이 선대로부터 제작기술을 각기 전수받아 그 맥을 잇고 있다.

[형태]

안성유기와 남원유기를 비교해보면 색채면에서 남원유기는 밝은 황금빛이 더했고, 주로 상류층에서 남원유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원래 남원유기는 순천의 궁그름옥성기 제조 방법과 비슷한데, 다만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이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그름옥성기는 반방짜유기라고도 할 수 있다. 절반은 주물 제조법으로 만들어놓고 불에 달구어 그릇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5% 대 25%로 합금하여 처음부터 주물된 놋쇠덩어리를 자주 불에 달구어 두들기면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반면 맞춤유기는 쇳물을 녹여 틀에 부어 만드는데 제작도 용이하고 합금도 자유롭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원래 남원산 유기 제품은 반상기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유기의 원료인 동·주석과 관련된 향로·촛대 등의 제기와 범종·담뱃대, 그리고 농악기인 꽹가리·징도 생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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