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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243
한자 黃義智
영어음역 Hwang Uiji
이칭/별칭 회당(悔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병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격대장
출신지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
성별
생년 1923년연표보기
몰년 2005년연표보기
본관 장수
대표경력 빨치산 남부군의 유격대 45사단 사단장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활동한 빨치산 지휘관.

[개설]

본관은 장수. 호는 회당(悔堂).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에서 아버지 황달주(黃達周)와 어머니 슬하에서 1923년 9월 10일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황의지의 집안은 중농 정도의 살림이었는데도 아버지는 민족 의식이 대단하여 사재를 털어 마을에 명신재(明新齋)라는 사립 학교를 만들고 선생들을 초빙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는 1930년의 일인데, 이런 사립 학교를 만든 것은 일제 하의 식민지 교육을 배척하고 민족 고유의 전통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황의지는 어려서부터 이런 분위기에서 2년간을 배웠다.

1933년에 동계공립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으나 명신재가 폐교될 때까지 9년 동안 명신재에서 생활을 했다. 이후에도 여기저기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한학을 공부하면서 가사를 도왔다.

그는 장수황씨로서 자긍심과 긍지가 남달랐다. 조선조 최고의 청백리 황희(黃喜) 정승과 임진왜란의 명장 황진(黃進) 장군이 직계 조상이었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黃玹)도 같은 가계였다. 이들의 초상화를 자기 방에 걸어놓고 아침 저녁 문안을 드리며 여생을 마칠 정도였는데, 이런 자긍심은 그의 일생을 통해 좌우명 이상의 사상적 지배로 군림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일제의 징집령이 떨어졌다. 가풍으로나 자신의 신념으로나 절대로 응할 수 없어 이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지만 가족들에게 닥칠 시련 때문에 입대해서 탈출할 각오로 징병에 응한다.

이때가 1944년 12월이었다. 몇 번을 시도했던 탈출에 실패하고 만주를 거쳐 중국의 사평에서 해방을 맞았으나 일본군 복장이라는 이유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러시아로 끌려가 수용소 생활을 하며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1948년 12월, 만 4년 만에 귀국했으나 38선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인천의 임시수용소에 갇히기도 하면서 1949년 4월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권력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추앙하던 김구마저 암살당하자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입산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1949년 6월 말경에 순창군 회문산에 있는 전라북도당으로 들어가 전북 유격대장 백암 박판쇠와 함께 유격 활동을 시작한다.

1949년 겨울 공세 직전 때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탈출에 성공한 그는 남원시 대산면풍악산을 거점으로 남원군당 세포망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원으로 잠입하여 활동하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는 남원군당 임시 군당위원을 조직한 다음 전북도당에 복귀해 도당 호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탱크 병단의 지휘관이 되어 팔공산, 장안산, 회문산 등을 무대로 유격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회문산의 전북도당이 무너지자 철수하면서 1만여 명의 병력과 당 지도부 및 입산 활동가들을 인솔하여 성수산에 도착한다.

성수산 부대 개편 때 418 독립 연대의 지휘관이 되어 지지골 작전, 여원치 작전 등을 감행하여 군·경에 막대한 타격을 준 그는 지리산에서 이현상의 남부군과 합류하여 부대를 개편할 때 45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독립된 유격대를 이끌고 전라북도의 동부 산악 지대를 운장산에서 지리산까지 종횡 무진하면서 활동했다.

45사단이 운장산에 있을 때 백야전 전투 사령부의 대공세를 피해 운장산으로 들어 온 전북도당을 맞아 함께 싸우다가 도당이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가자 지리산에서 보급 투쟁 등을 하다가 전북북부당 지도부의 활성화하라는 임무를 받고 활동하던 중 사단장 신분으로 다시 군·경에 체포당했다.

당연히 사형감이었으나 남원경찰서장 이규형(李揆亨)의 배려로 풀려나온 황의지남원경찰서 산하 사찰 유격대에 협조하면서 빨치산 구제에 노력하던 중 지리산 소개 지구 수복령이 내려진다. 이것이 1955년 5월의 일이다.

황의지는 수복 지구 책임을 지고 남원군 산내면 반선마을에 정착한다. 순창이 고향인 그가 지리산 반선마을에 정착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김지회가 사살당한 현지를 지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그는 김지회의 시신 발견 현장에 무덤을 만들고 그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는 빨치산의 고위층이었다는 전력 때문에 일생을 감시받으며 살았고, 그 고충은 이를 데가 없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A급 감시 대상자로 분류되어 시달렸으며 전두환 정권 때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지리산을 아끼고 반선마을의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아동 교육에도 남다른 열성으로 헌신하여 전라북도 교육감, 전라북도 도지사의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58살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겪은 고초로 병든 몸을 이기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시달림을 당했다.

자서전 『한민족의 뿌리는 살아 있다』를 집필하였고, 종중 일에 전념하면서 『황진 장군과 임진왜란』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이 원고들은 출판되어 빛을 보지 못한 채 아직도 사장되어 있다. 그는 2005년 1월 14일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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