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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899
한자 楊希迪
영어음역 Yang Huijeok
이칭/별칭 길부,모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윤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아산리
성별
생년 1555년연표보기
몰년 1601년연표보기
본관 남원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길부(吉夫), 호는 모정(慕亭).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의 후손이며 둔재 양사(楊泗)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팽로·양대박 등과 함께 고경명을 찾아가서 창의하였다. 그들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고 담양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양희적은 삼종형 직장 양사형과 정랑 이대윤, 정자 최상중 등과 모량관(募糧官)이 되어 의병의 진중으로부터 격문을 전하였다. 이어서 박천정과 함께 부전운량장이 되고, 이대윤최상중은 재향운량장이 되자 끊임없이 군량을 보급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이언빈의 의병이 남원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는 박천정과 함께 군량을 보급하여 의병의 식량을 해결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조정에서는 봉훈랑 내선사판관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로 돌아왔다. 고을 사람은 그를 모정 선생이라 불렀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모과정에 있으며, 황윤석이 전(傳)과 묘갈명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정조 연간에 고을 선비들이 아계사(阿溪祠)를 세우고 증조부인 양돈(楊墩)과 함께 제향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12.22 오탈자 콘텐츠 한자 "梁 → 楊" 변경
2011.10.18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모량관(募粮官)이 되어 의병의 진중으로부터 격문을 전하였다 ->모량관(募糧官)이 되어 의병의 진중으로부터 격문을 전하였다 〇 한자는 정자(正字)를 사용함이 교열 지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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