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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891
한자 梁慶遇
영어음역 Yang Gyeongu
이칭/별칭 자점,제호,점역재,요정,태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윤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성별
생년 1568년연표보기
몰년 1638년연표보기
본관 남원
대표관직 참봉|종사관|홍문관교리|봉상시첨정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점(子漸), 호는 제호(霽湖)·점역재(點易齋)·요정(寥汀)·태암(泰巖). 아버지는 충장공 양대박(梁大樸)이다.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양대박이 창의하자, 아우 양형우(梁亨遇)와 함께 아버지를 보필하였다. 양경우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고경명(高敬命)에게 갔는데, 고경명양경우에게 기무를 맡겼다.

때마침 왜적이 금산(錦山)을 치려 하자 고경명양경우에게 진산(珍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이에 고경명을 구하려고 가는 중에 아버지가 진산에서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되돌아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전주(全州)로 옮겨 청계동으로 돌아가 장사를 치렀다.

1595년(선조 28)에는 격문을 돌려 군량 7천 석을 모으는 공을 세우니 조정에서 참봉에 제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다. 그 해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죽산현감·연산현감을 거쳐 판관이 되었다.

1616(광해군 8)에는 중시(重試: 조선시대에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번씩 실시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고 이어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그 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학문과 사상]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술 및 작품]

유집 『제호집(霽湖集)』은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와 함께 묶어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조정에서 이조참의를 추증하였다. 정조 때에는 정려(旌閭)를 내렸는데 거기에는 ‘부자충의지문(父子忠義之門)’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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